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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소풍 이정희 Nov 24. 2024

가을길 13,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길 13.

밀라 메이요 드 몬쥬르다에서 산솔까지(19.1km)

끝없는 평원

  철 지난 밀밭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 끝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닿아있다. 저 빈 들판 가득 밀들이 노랗게 익어 출렁거릴 산티아고 봄길을 걷고 싶다.

 그늘이 없어 맑아진 하늘 위로 해가 꽤 뜨거웠다. 끝없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밖에'


 해를 친구 삼아 빈 길에서 그림자놀이를 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그런 모습을 여러 가지 재미있게 연출했다.

 사진을 정말 좋아하여 상황마다  다른 사진을 찍고는 카톡 프로필을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바꿀 정도이다.

천사 그림자놀이

 우리의 이런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며 뒤따라 오던 뉴질랜드에서 온 부부는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여러 모습을 연출하다 뉴질랜드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천사 같은 포즈를 취해 우리 4명은 크게 웃었다.

오아시스 푸드트럭

 식사를 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가끔 길 중간에 있는 푸드트럭은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오늘은 꽤 규모가 있고 깔끔한 곳을 만났다.


 친절한 모녀가 개성 있는 세요까지 준비하여 순례자들을 불러 모았다. 알베르게에서 간단한 조식을 먹고 출발하였는데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스페인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색깔이 고운 오렌지를 즉석에서 짜내는 주스이다. 인스턴트 오렌지주스에 별 맛을 못 느끼던 나는 언제 어디서 먹어도 달고 새콤한 스페인 주스가 좋았다.


 오래 걷다 보면 갈증이 나는데 하루 한 번 주스를 파는 푸드트럭이나 카페를 보면 뛰어가게 된다.

 그래서 스페인의 거의 모든 카페와 식당은 즉석 오렌지주스 기계가 있고 싸고 맛있다.

길가에 야생 포도밭과 오디, 무화과, 산딸기가 많아 매일 실컷 먹었다.  


  진짜 문제는 화장실이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공중 화장실을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중간에 카페에 들러 해결하였지만 이제는 며칠에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노상방뇨를 하는데 익숙해졌다. 


 천천히 걸으며 길가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이곳은 평원지대라 나무조차 없는 곳이 많다. 주위를 둘러보다 뒤에 걸어오는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으면 큰 나무 뒤로 숨어 소변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자전거나 사람이 보이면 무안하지만 그들도 아는지 모르는 척 지나가곤 한다.

로스아르고스 대성당

  오래된 로스 아르고스 마을 입구에는 오리와 염소, 닭들이 길 가운데 떼를 지어 노닐고 있다.

 그러다 큰 개가 나타나 사납게 짖으면 작은 동물들은 한순간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개가 목동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지나던 순례자들은 신기한 듯 놀라고 주인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살지 않은 것 같이 무너질 듯 낡은 구시가지 골목 끝에 그 유명한 로스 아르로스 대성당이 있었다. 정오인데도 문이 닫혀 있어서 정말 아쉬웠다.


 한 구간이 끝나는 로스 아르고스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머무르지만, 나는 다음 마을인 산솔에 숙소를 예약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설명회 때  낡은 이곳보다 산솔의 알베르게가 시설이 좋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자갈길

 산솔까지 들판 길은 뜨거운 태양 아래 계속 밋밋한 자갈길이다. 이런 길인 줄 미리 알았으면 점프하고 싶을 정도였다.

 친구는 발에서 불이 난다며 양말을 벗고 판초를 베개 삼아 벤치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은 좋은 길이였구나 감사를 느낄 정도였다.


 '그래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에 이렇게 지루하였던 적도 있었지.'


순례길을 걸으며 자주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걷는 모습과 속도이다.


 걸음이 정말 빠른 순례객들도 많다. 따라 걷기보다 나의 속도를 정해야 먼 길을 오래 걸을 수 있다는 걸 게 된다.

 저녁마다 알베르게에서 절뚝거리거나 테이핑의 강도가 심해지는 발 부상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피로 때문에 연박을 하며 쉬고,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꽤 여럿 있었다.

 반대로 힘든 구간이 아닌데도 택시나 버스를 타고 점프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  

무사히 순례길을 걸을 수 있기를

이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기를

산솔 알베르게
혼자 산티아고에 온 여인들

 역시 산솔의 알베르게는 듣던 대로 운치가 있고 시설이 좋았다. 오래된 관청을 보수하여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는데 깔끔하고 멋스러웠다.

 가늘게 들리는 음악 소리를 따라가니 바에 순례자들만 모여있었다.

저녁식사 시간

이곳에서 혼자 온  한국인 여인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힘든데 정말 좋아요"

 '한국인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네요?'


 알베르게의 순례자 정식을 13유로에 신청하여 먹었다. 소문대로 주인은 자부심이 넘쳐  자기소개 말이 많았고 음식은 짜지 않고 맛이 있었다.


 순례길을 즐기는 세계 여러 사람들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섞어 말을 하였다. 말이 달라도 서로 무슨 뜻인지 알았고, 호응하며 여유를 즐겼다.


 서울은 덥고 추석 연휴로 바쁘다는데 이곳은 날씨 변화가 심하고 시간이 멈춘듯하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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