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까지(20.8km)
알베르게에서 자는 날은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새벽 2시부터 한 시간마다 눈이 뜬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층 침대가 아닌 싱글 침대를 배정받아 이 층 침대에서 움직이는 소리도 없는데 뒤척인다. 코를 고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특히 노년의 남자들은 모두 코를 심하게 군다. 어떤 사람은 온 방안이 들썩일 정도여서 많은 사람들이 깬다. 그래도 잠에서 깬 사람들 모두들 아무 소리 없이 서로를 쳐다 볼뿐 참아낸다.
침낭에서 자는 모습도 다양하다. 침대를 가져온 옷으로 천막처럼 가리는 사람, 상의는 없고 팬티만 입고 자는 사람, 옷 입은 채로 그대로 자는 사람 등등---
이럴 때는 조용히 핸드폰을 켜고 글쓰기를 하고 블로그 글을 읽는다.
'만약 내가 매일 글쓰기를 안 한다면, 블로그를 안 한다면, 이 시간이 얼마나 힘들까?'
오늘은 다음 구간인 산토도밍고까지 21km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라 그런지 알베르게에는 아침 6시인데 일어나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보통 다른 곳 알베르게는 5시부터 서두르는 사람이 많아 6시면 전체 기상이고 8시면 체크아웃이라 서둘러야 한다.
알베르게에 미리 신청한 조식을 먹고 8시에 천천히 나선다.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지를 들어서자 천년의 대성당과 수도원이 보인다.
이곳도 페스티벌 기간이고 어젯밤 광장에서 공연과 파티가 있었는지 어수선하고 환경미화원들이 분주하다. 어디든 도시의 아침을 상쾌하게 하는 것은 부지런한 환경미화원들 덕분이다.
나헤라를 둘러싸고 있는 붉은 바위들처럼 아침 하늘이 스산하다. 오래된 시가지를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사람이 사는 곳임을 알게 하는 것은 줄 이은 산티아고 순례자 행렬이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 자기 시간대로, 보폭만큼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다. 순례자들이 계속 보여 시골길 끝이 안 보인다.
순례자들의 뒷모습을 자세히 본다. 그러다 자주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곤 한다. 다양한 순례자들의 모습에 자주 울컥하곤 하다. 그래서 일부러 뒤로 걸을 때가 많다.
'세월아 네월아---'
'사람이 참 아름답다!'
오늘도 끝없는 들판에 포도밭과 텅 빈 밀밭을 보며 걷는다. 부지런한 주인을 만난 포도밭과 방치되어 있는 포도밭을 많이 보게 된다. 잡초가 없고 찰진 흙의 포도나무들은 땅에 닿을 듯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버려진 포도밭들이 꽤 많이 있다. 돌덩이와 잡초가 우거진 밭의 포도들은 보기에도 확연히 다르고 포도가 질겨 맛이 없다.
며칠 전부터 무수히 많은 포도밭들을 보며 포도송이들이 어린아이처럼, 사람처럼 보였다. 평생 학교에서 아이들을 생각해서인가 보다.
60년 넘게 살며 사람을 기르는 일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유전적 요인도 크지만 부모의 태도와 교육, 사회적 요인,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안에서의 부모의 교육관과 언행일치이다.
생명을 키우는 것, 사람을 제대로 교육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 결과에 점점 더 절감한다. 뭐든 생명이 있는 것에 진심이어야 하고 제때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며칠째 걷는 넓고 긴 들판의 자갈길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씩 달라지는 자연의 색깔들을 알게 되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지금은 뭐든 좋고, 곱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굽이 흙길을 걸으며 고등학교 때 무조건 외웠던 박목월 시인의 시 '남도 삼백 리'가 떠올랐다. 어렴풋이 읊조리며 이제야 의미를 곱씹었다. 영화 '서편제'의 길도 생각났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러다 길친구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말하며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야기했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ㅡ조르바ㅡ
어렴풋이 소설 속의 문장이 떠올랐고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렇다.
어느덧 62세,
지금이 제일 젊다고,
이 시간들이
다시는 안 올 거라며--- '
우리는 이 소설의 영화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배우 앤서니 퀸의 일생까지 이야기했고 그의 미친 연기력을 추앙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장면처럼 넓은 밀밭에 들어가 뛰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좋으면 사진을 남겨야 해.
그래야 기억하고
이 순간이 오래 남을 수 있지!"
이제 보름 남짓 같은 순례길을 걷다 보니 자주 만나는 길 친구들이 있다. 어제 말문을 튼 미국 동갑내기 두 친구와 며칠 전 구글맵으로 길을 가르쳐 준 타이완에서 온 세 자매, 프랑스 세명의 노인들이다.
처음에는 서로 의례적인 인사로
"브엔 카미노"
"올라"
를 외치다, 점점 반갑게 눈인사를 하다가 오늘은 정말 반갑게 손짓으로 함께 하자며 사진 찍기 놀이를 했다
뒤에 오는 타이완 친구들을 발견하고 불러 같이 사진 찍고 프랑스 친구들까지
합류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의아해하더니 기다렸다는 듯 밀밭 들판으로 건너 뛰어와 사진을 찍었다.
'스틱을 위로 들고, 뒤로 돌아 뛰고, 하트를 외치며---'
산티아고 도밍고까지 계절이 끝난 포도밭과 밀밭, 해바라기 밭을 보고 걸으며 나이가 지긋한 순례자들은 멈추기를 여러 번 했다.
나뿐만 아니라 연배가 비슷한 미국인, 타이완인, 프랑스인들까지.
서로 말은 안 해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 많았으리라.
'지난날들이, 지내야 할 날들보다 이 시간이 너무 좋아!'
산티아고 도밍고 시가지가 보이는 내리막 자갈길은 길고 힘들었다. 미국인 동갑내기가 유난히 힘들어했다.
며칠 사이 정이 들었는지 안타까웠다.
'저러다 그만두면 안 되는데--- '
'끝까지 함께 하면 정말 좋겠다!'
걱정이 되어 빨리 가던 길을 멈추어 나란히 걸으며 주먹을 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인상을 쓰던 얼굴이 환해지며
"정말 고마워"
하며 말하는데 힘들었지만 정말 기뻤다.
언덕이 끝나고 길가 시멘트 둑길에 앉아 쉬고 있는데, 옆에 와서 앉으며 작은 쇠로 만든 산티아고 조개 목걸이를 선물한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준 뭉클한 선물
'나의 조가비'
밤 9시 반 산타 도밍고 시내는 축제의 마지막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내 인생 후반전의 축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