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동남아, 그럼에도 좋은 이유
우리나라엔 왜 야자수가 없을까
모든 사진은 2019년 11월 타이베이 여행 중에,
Contax G2, Contax T2와 다양한 필름으로 촬영하였습니다.
색감 및 조도가 일정치 않은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생활이 어느덧 만 2년이 다 되어간다. 다행히 휴가를 융통성 있게 쓸 수 있는 회사라 올해만 해외여행을 3차례 다녀왔다. 그럼에도 남은 휴가와 해야할 업무가 머리속에 둥둥 떠다니는 상황에서 달력을 보면 길어야 4~6일의 휴가다. 물론 마음 먹고 7-10일도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고 나면 다시 돌아왔을 때의 후폭풍이 내심 부담스럽기도 하다.
기간을 바꿀 수 없다면 결국 그 시간과 비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게 우선일 터. 답은 언제나처럼 동남아로 귀결된다. 하노이가 그러했고, 홍콩이 그러했고 이번 타이베이 여행도 이렇게 정해져버렸다.
물론 동남아가 싫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러다 아시아권을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2016년에 6개월을 동남아(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에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 취직하고 나니 다시 또 이렇게 동남아를 가게 되는구나, 그 때 다른 곳 갈걸....하는 일말의 아쉬움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고른 타이베이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비행기를 탄다는 점, 잠시라도 한국을 벗어나 나의 일상이 아닌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기분이 들뜨게 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크게 내키지 않았던 4박 5일간의 타이베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결론은 좋았다. 많이 걷고, 많이 둘러보며 즐거운 여행을 했다. 기대가 덜 해 많은 필름을 챙겨가지 못했기에, 가지고 간 것들로 아껴가며 눈에 띄는 장면들을 담았다.
언제나처럼 필름들을 고이 모아 택배를 보내고, 배송 도착 알림을 받고, '스캔이 완료되어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하는 가슴 설레는 문자를 받는다. 아, 쫄깃한 필름 포토그라피! 아날로그의 참맛이여.
이렇게 학수고대하던 스캔사진들을 쭉 보고 있노라면 제법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브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야자수. 정확히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야자수에 끌린다. 야자수가 좋다. 야자수를 보면 찍고 싶다. 좋아하는 데에 어떤 이유가 없으면 진짜 좋아하는 거라고 하던데. 진짜 좋은 게 맞나보다. 이번 타이베이 여행이 생각과 다르게 좋았던 것에 한 나라의 수도, 도심 속 야자수도 한몫했다.
야자수는 무더운 (아)열대기후에서 식생한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나 남해 일부지역 외에는 야자수를 볼 일이 없다. 수도권 거주자에게는 연 2-3회 조차 보기 어려운 희귀한 식물인 것이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 같은 게 있기 마련. 가진 게 많아도 내가 가지지 못하면 아쉬움이 있다. 내가 항상 야자수를 떠올릴 때면 드는 생각이다.
서울엔 왜 야자수가 없을까.
서울에도 야자수가 있었더라면.
'내가 야자수를 이만큼 원하지도, 보고 싶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겠지.' '그저 흔하디 흔해서 한 장에 7-800원 이상 드는 필름으로 찍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다가, 그럼에도 서울에 야자수가 있으면 좋겠다....로 회귀.
야자수는 멋있다. 난 멋있다고 생각한다.
고개를 제법 제쳐서 올려다보아야하는 큰 키, 대나무처럼 잔가지 없이 날렵하게 쭉 뻗은 기개, 거칠게 느껴지는 기둥의 표면에서 전해지는 단단함, 무엇보다 손 닿으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잎사귀. 심지어 잎이 달려있는 모습도 멋있다. 폭죽이 한바탕 터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해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너무 멋있을 땐 가끔 비속어가 아니면 도저히 표현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ㅈ간지....
여기까지가 외형적인 모습이라면, 기억 속에서 한번쯤 먹어보았을 야자열매의 고소하고 달달한 맛, 언젠가 무한도전 무인도 특집에서 정준하가 야자수 깨부수던 장면을 재밌게 봤던 기억(은 뜬금없이 왜 떠오르는 건지)에서 전해지는 심리적 요인은 보너스다.
우리나라에도 한 겨울에도 독야청청 푸르름을 지키는 상록수, 소간지.....소나무도 있고 한철골 박비향의 강인함을 나타내는 매화도 있지만, 왜인지 야자수가 더 끌리는 걸 애써 막을 수가 없다. 더더구나 이렇게 다른 풍경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라면.
조금 더 벌판 같은 느낌에 홀연히 솟아있는 외로운 느낌이었다면 금상첨화였겠다 싶다. 물론 야자수도 자체로도 좋지만.
정확히 모르긴 몰라도, 하노이 도심에서는 야자수를 많이 못 봤다. 너무 오토바이만 봐서 정신이 없었던 건지, 정말 많지 않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홍콩은 확실히 도심에서 야자수를 쉽게 볼 수 있다. 다양한 매력이 있지만 홍콩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
타이베이도 마찬가지다. 도시 곳곳, 굳이 공원이 아니더라도 거리마다 골목마다 야자수를 정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다소 일본+동남아의 어중간한 이미지로 막연히 타이베이를 떠올렸던 내게, 타이베이가 짧은 기간이나마 내게 진한 끌림을 주었던 건 어디서든 눈 돌리면 야자수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두서 없이 쓰는 글이라 마무리가 애매하다.
1) 맨날 가는 동남아 그만 가고 싶다
2) 막상 갔다오니 그래도 좋았다
3) 야자수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4) 야자수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