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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림 Oct 20. 2024

성공 그리고 사랑

비밀연애와 던킨 도넛


현실은 녹록지 못했다. 가수 데뷔는커녕 내가 가요제에서 수상한 것을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어렵게 대학가요제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고 수상까지 했지만 실상은 내 단독 앨범하나 낼 수 없는 처지였던 거다. 2000년, 세상이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는 다르게 밀레니엄 시대가 열렸지만 내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난 내 음악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출전한다는 난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에 도전했다. 곡은 당시 대학가요제에 이어 IMF로 경제난으로 인해 청년 취업난이 심각해져 있던 사화상을 가사로 쓴 '신 백수가’로  참가했다.


자작곡이지만 정규 음악 교육은커녕 어릴 적 ‘체르니 100번’까지만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작곡을 하다 보니 이 곡을 만드는데 고생만 잔뜩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라고 했던가 이번 대회 결과는 대상 수상이었다.


나는 드디어 대중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 소셜테이너 뮤지션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고 이 시기 여러 기획사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다.     


“네가 우리 회사로 오기만 하면 백지 수표를 건넬 수도 있어!”     


라는 회사도 있었지만 대신 솔로가수로 데뷔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밴드 음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2000년, 대중 음악계의 생태계는 남자 솔로 가수가 대세였고, 어설프게 록밴드를 한다고 말하면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딱 좋은 생태계였다.     


많은 고민을 하다 보니 군대에서 만난 김병장님이 생각났다. 군 전역하면 한번 만나자고 했던 김병장은 전역 후 공중파 라디오 방송의 메인 DJ로 성공적인 복귀를 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에게 연락을 하니 당장 만나자고 한다. 군에 있을 땐 사회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심했을 만큼 그는 라디오계에선 인기 스타였다.

 

“이젠 진짜 록스타가 되었네?”     


그가 내게 던진 첫 말이다. 그를 끌어안으며 모두 김병장님 덕분이라 했다. 내 말에 기뻐하는 그에게 자연스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고민 중인 내 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과거 함께 군에서 운전병 사수와 부사수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때 그 모습처럼 그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연거푸 소주잔을 기울이던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상봉한 이산가족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 불성이 된 채 그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음날 늦잠을 잤다. 모르는 번호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술이 덜 깬 상태여서 정신은 없었지만 부재중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이랬다.     


“XX엔터입니다. 밴드 하고 싶다고요? 우리 한번 만납시데이.”          


갑작스러운 급보에 외출 준비를 끝내고 전화를 준 기획사를 찾아갔다. 솔로 앨범 2장을 내고 반응이 좋으면 밴드를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회사의 제안이 있었다. 난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바로 계약했다. 여론은 우리의 딜은 모르체 전도유망한 실력파 뮤지션이 백지수표도 마다하고 중소규모의 기획사와 계약을 했다는 점을 어필해 줬다.          


사실, 나중에 소속사 사장님이 말해준 거지만 이 회사에 나를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라디오 DJ를 하던 김병장님이었다. 사장님과 나는 8년 차이가 났지만 김병장과 사장님은 친구사이였다.


소속사 여론 홍보 덕에 개념 있는 실력파 뮤지션이란 타이틀로 첫 독집앨범을 발매했고 2집까지 순항하며 준수한 판매량과 공중파 3대 방송국에서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최고의 인기가수로 등극했다. 싱어송라이터로 성공하니 신인가수와 기성가수들의 앨범 프로듀싱은 물론 곡 작업까지, 정말 공장에서 음반을 찍어내 듯 정신없이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유명세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오늘은 신인 여자 가수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KBS합창단에 있다가 모 기획사에 발탁되어 내게 앨범 타이틀 곡을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운명인가?”           


첫눈에 반했다. 특히 그녀의 입술과 보조개는 내 이상형의 표본이었다. 혹자는 무슨 입 모양이 네 이상형이냐고 말하던데, 난 그녀의 입술과 보조개에 반해서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 그녀의 타이틀 곡 작업을 핑계로 그녀를 작업실로 불렀다. 그녀가 들어왔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암말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자 답답한 듯 그녀가 먼저 내게 말했다.

“선배, 나 좋아하는구나? 나랑 사귈래?”      

    

그날밤 작업실에서 내 첫 동정을 그녀에게 바쳤다. 난 첫 경험이라서 버벅거렸지만 그녀는 나를 리드했고 그날 이후 난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데뷔를 앞둔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비밀연애를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준 곡이 가요 톱 10 정상에 오르며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녀는 하루아침에 톱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잦은 방송 출연과 지방 행사들로 인해 우리는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방송 스케줄 때문에 방송국으로 향하던 중 차창 밖을 바라보다 신문 좌판에 특종기사 라며 그녀의 얼굴이 도배되어 있는 게 보인다. 운전하던 매니저를 시켜 신문을 사 오게 했다. 스포츠 서울에 실린 그녀의 기사를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세상에, 첫사랑 그녀가 자신이 소속된 회사 사장과 결혼 발표를 하며 대서 특필 되어있었다.

   

그렇게 믿고 또 믿었는데, 난 이 사건으로 실의에 빠졌다. 거기다 연락도 되지 않는 그녀 때문에 음악 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했다. 김병장님이 전화를 해왔다. 두말없이 만나자고 한다. 난 그를 만나기 위해 방송국 근처 밥집에 들어가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내게 달려왔다. 우리는 말없이 소주 세네 병을 비웠고 그렇게 마음으로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말했다.         

 

“호림아, 네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밴드의 꿈은 접은 거니?”          


얼큰하게 취했지만 그가 했던 이 말은 내 머리의 후두 부분을 강타하는 쇠몽둥이 같았다. 흡사 어릴 적 경찰서에 끌려가 머리를 사정없이 구타당했던 충격만큼의 딮 임팩트였다. 첫사랑 그녀를 잃어 식었던 내 열정은 ‘밴드 결성’ 이란 목표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소속사 사장님께는 계약 초기 약속한 솔로 앨범 두 장을 모두 마무리했고 이제 밴드를 만들어야겠다 말했다.          


밴드를 만든다고 하니 주변에선 한창 솔로가수로 최정상에 있던 나를 미쳤다고까지 했다. 실망한 소속사 사장님은 밴드를 하려면 그간 네가 누린 것 모두 다 토해 내고 회사를 나가라고까지 엄포를 놓았다. 물론 새로운 기획사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건달 출신 소속사 사장님은 내겐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항상 지하 룸살롱으로 소속 가수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자신의 충고를 직설적으로 하는 그를 이겨먹을 자신도 없었다. 그는 꼭 당신 말을 거역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 같아 보였지만 난 결단을 내렸다.          


“사장님, 저 밴드 만들겠습니다.”          


그는 삐딱하게 소파에 앉아 여러 가지 맛이 담긴 던킨 도넛 세트를 하나하나 종류별로 꺼내 딱 한 입씩만 베어 먹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그는 먹던 도넛을 박스에 내려놓았다.       


“호림아, 이 던킨 도넛은 맛이 다양해서 여러 가지 다 먹어보고 싶은데 이걸 다 먹으면 배가 불르다카이.     

 그래서 한 입씩만 베어 먹고 있는 중이었데이.     

 야, 이거 더러운 거 아니다, 니도 한번 무~ 봐라.”


정말 무서웠다. 무서워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곤 애써 두려움을 숨기려 눈을 피하는 내게 사장님은 말했다.          

“니, 이 던킨 도넛의 여러 가지 맛처럼 다양한 음악 할 수 있겠나? 대중적인 것도 하고, 네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말이다. 내 그라믄 니 밴드 하라고 할끼.대신 인기 떨어지면 니 죽고 나 죽는 기다.”          


그의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난 그렇게도 무서웠던 사장님을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 그의 입술에 묻어 있는 던킨 도넛의 설탕 가루 때문인지, 내 인생 첫 동성 키스는 너무도 달달했다.




- 사장님이 던킨 도넛을 한 입씩만 먹고 나에게 먹어보라 말하는 장면은 90년대와 2000년대 던킨 도넛은 상당히 귀한 음식이었다는 기억에서 착안했다.          


- 글 중 ‘유재하 가요제’는 참가 부분은 작가가 실제로 IMF 시기를 지나며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을 묘사한 자작곡으로 참가했던 경험에서 착안했다. (난장 음향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고 피아니스트 김광진과 밴드 자우림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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