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애프터(A.F.T.ER)의 탄생기
과거 스쿨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해 본 경험이 전부인 내가 프로페셔널(professional) 밴드를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어떤 장르의 밴드를 만들 것인지에서부터 시작됐다. 물론 내 음악을 하고 싶고 과거 밴드 생활의 그리움을 잊지 못해 밴드 음악을 하겠단 열정이 앞서긴 했지만 혼자서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가 생각났다. 김병장님! 오랜 라디오 디스크쟈키 경험을 가진 그는 음악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고 특히 70년대 80년대의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 밴드들을 잘 알고 있었다. 국내 음악의 경우 러닝타임이 길어야 3분 ~ 4분인데 그는 내게 러닝타임이 한 곡에 12분, 심지어 턴테이블에 Lp를 올리면 한곡이 너무 길어서 잠시 졸고 있다가 깨어나보면 턴테이블 바늘이 Lp 끝에서 걸려서 띡, 띡, 띡 소리를 내면서 A side가 끝나는 대작들도 내게 소개했다.
처음 접하는 장르의 음악들은 내겐 신세계였고 이런 대작들을 추천해 주는 김병장님은 음악적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명언이 있다.
“음악을 잘 알려면 가능한 모든 장르의 음악을 뭐든 많이 들어야 한다. 호림아.”
어느 날엔 김병장님의 이런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 허세 가득한 LP쇼핑을 하기도 했었다. 같은 기획사 소속 가수 중 나를 존경한다는 몇몇 후배들과 함께 대형 레코드 샵(LP판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선 선반 전체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LP들을 손가락으로 맨 처음 앨범과 마지막 앨범은 주욱~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
“사장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있는 앨범(레코드판) 다 포장해 주세요.”
그러면 후배 가수들은
“와~ 역시 저 형은 음악을 많이 들으니 음악을 잘하나 보다. 형, 음반 좀 빌려주세요.”
그들은 내가 사들인 무지막지한 양의 레코드판을 낑낑거리며 방배동집까지 운반하느라 진땀을 뺐다. 사실 여기서 커밍아웃하자면 그때 구입한 앨범들은 지금까지도 먼지만 가득 쌓인 체 다 듣지 못했다.
김병장님의 조언을 통해 다시금 팝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고 모든 록음악을 기반으로 하지만 대중적인 음악을 만드는 그룹 AFTER(애프터) 란 밴드명을 만들었다. 애프터는 영어 Alive Favorite Team ~ ER의 약자였다. 이제는 밴드 애프터의 멤버를 구성해야 했다. 멤버들은 나와 음악적 견해 차이가 없어서 내분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만큼 밴드 멤버의 성향은 리더인 음악적으로 같은 곳을 바라봐야 안정적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다.
첫 멤버를 영입하기 위해 찾아 간 사람은 바로 고교시절 ‘제1회 SBS 신세대 가요제’에 드럼어로 함께 출전하려 했지만 방송국에 오지 않아서 드럼 파트를 빼고 출전했고 덕분에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한 친구 이준철 군이었다. 우선 내 소속사 매니저에게 이 녀석을 수소문해 달라 부탁했다. 얼마가 지나 매니저는 이 친구가 인디씬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가 활동하고 있다는 홍대의 한 펍으로 찾아갔다. 나름 10대 가수로서 외출할 땐 변장에 변장을 하고 나갔지만 펍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무대에서 강렬한 테크닉으로 합주를 하고 있는 데쓰 메탈 팀의 연주가 들린다. 강렬함에 이끌려 사람들을 뚫고 무대로 앞쪽으로 전진했다.
질드진(zildjian) 심벌이 박살 날 정도로 밴드의 드러머의 연주 솜씨는 헤비 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공연이 끝나고 스테이지 뒤로 가서 그를 만났다. 역시 소프트한 파워 드러머의 정체는 준철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어릴 적 음악을 같이 했던 동지의 얼굴은 잊히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ㅎㅎ (이건 내가 한 말이다 :)
녀석은 어릴 적 음악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때 그 시절, 그 모습이었다. 나를 보자 녀석이 깜짝 놀란다.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는 그는 아직도 고교 시절 SBS 오디션에 불참했던 사건을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오디션에 출전할 당시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들로 오디션 시간은 수업이 있던 시간에 딱 걸려있었다. 그런 이유로 선생님께 말씀드려 조퇴를 하고 오디션을 출전해야 했는데 90년대 당시엔 조퇴해서 오디션 보러 간다고 하면 선생님께서 칭찬을 하시기보단
“이 녀석, 딴따라가 되려고!”
라면서 정신 못 차린다며 몽둥이찜질을 하실 확률이 더 높았다. 오죽이나 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됐어! 됐어! 그런 가르침은 이제 됐어!”
라며 노래를 했겠는가? 준철이 역시 이런 사정으로 학교에서 조퇴 승인을 받지 못했고 당시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서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참, 오랜 시간 녀석을 오해하며 살았다. 당시엔 네 멋대로 음악하고 약속도 안 지키는 너랑은 절교다! 다시는 안 보겠다 라며 지금껏 살아왔다. 이런 오해가 풀리자 준철이에게 말했다.
“야! 나랑 밴드 하자!”
자신의 팀을 배신해야 하기에 난색을 표하던 준철이는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데스메탈밴드를 탈퇴하고 그룹 애프터의 1호 멤버가 되었다. 우리는 어릴 적 밤을 꼬박 새우며 음악 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갔다.
이제 강력한 쇼맨쉽과 연주 스킬을 겸비한 기타리스트와 밴드의 합주를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이끌 베이시스트도 필요했다. 정말 이 시기, 밴드 멤버를 섭외하려고 준철이와 홍대 인디신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준철이는 나와 함께 다니면 그가 내 매니저인줄 알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호림 씨 매니저시죠, 저 싸인 한 장만 받아도 될까요?”
그때마다 준철이는 겉으론 괜찮은 척은 했지만 상당히 자존심 상해했고 훗날 이 문제 때문에 밴드가 해산되는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심사 숙고 해서 베이시스트와 기타리스트를 뽑았다. 이 두 사람은 이미 수많은 밴드의 세션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 밴드의 합주를 고도화하기엔 충분한 실력을 가진 재원들이었다.
그러나 첨부터 영입이 쉽지 않았다. 그 둘은 우리가 밴드의 멤버가 아닌 세션맨(연주자)을 구하는 줄 알았는지 우리의 제안을 거부했었다. 그런 그들에게 초특급 대우를 약속했고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고 준철이와 함께 특급 호텔로 그들을 불러내 밥과 술을 사주며 설득하면서 애를 썼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기타리스트는 자신이 소속된 밴드를 배신할 수없다며 우리 밴드에 합류할 수 없다 말했다. 난생처음 특급 호텔에서 이런 대우를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그를 보며 난 애가 탔다.
사실, 밴드 결성을 선언하면서 소속사 사장님께는 이미 밴드가 다 결성된 듯 말했기 때문에 불같은 성격의 사장님께 만일 아직 밴드 결성이 덜 되었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간다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엄습했다. 나는 최후의 선택으로 기타리스트인 그가 효자라는 말을 전해 듣고선 그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과일바구니를 들고 그의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띵동~ 띵동~’
문을 열고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라시는 어머님께 인사를 하고선 바로 고자질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설명이 끝나자 아주 드라마틱하게 현관문을 열고 기타리스트가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이렇게 인기 가수가 일을 같이 하자면 감사하다 말하고 바로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결국, 그의 어머니 덕에 밴드 가입을 거부하던 효자 기타리스트는 에프터의 3호 멤버로 영입되었고 이로서 우리는 록밴드의 구성원을 모두 갖춘 밴드로서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
1960년대에 영국에서 발생한 대중음악으로 클래식이나 재즈 등 다른 장르를 크로스오버 하여 복잡한 월드 음악을 구사하기도 했다. 곡의 길이가 긴 것이 많다.
- 표지는 전시공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