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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림 Oct 22. 2024

실패, 밴드의 해산

밴드(AFTER)의 해체가 아닌 해산을 결정했다.



‘애프터’의 전국 투어는 매진에 매진을 거듭하며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의 인기는 최절정으로 치달았고 심지어 평론가들은 밴드 멤버들의 숨소리만 녹음해서 앨범 발매를 해도 50만 장은 팔릴 거라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 달간의 휴식기를 보내고 애프터 2집을 제작하기로 하고 멤버들과 잠시 작별을 했다. 심신이 지친 나는 일본으로 여행을 결정했고 얼마 전 마스터링을 위해 만났던 현지 가이드와 함께 여행을 했다. 맛있는 음식과 료칸에서 지내면서 온천욕을 하니 세상 천국이 따로 없었다. 여행 마지막날 초 저녁부터 숙소에 입실해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로컬 가이드였다.     


“형님, 제가 아는 여자 친구들과 술 한잔 하려는데 나오시렵니까?”    

 

물론, 여자 친구란 말에 그걸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숙소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온 가이드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이미 그의 일행들이 타고 있었는데 가볍게 인사를 하기 위해 눈밀러를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눈밀러로 보이는 여성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꼭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저녁시간이라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맛집이라며 가이드가 데리고 간 식당 앞에서 내리면서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봤다. 순간 너무 놀랐다.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그녀는 과거 내가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그녀의 하관과 너무 닮아 있었다. 거기다 웃는 모습은 완전 판박이였다.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설렘도 다시 느껴졌지만 이런 나에 비해 그녀들은 내가 한국에서 온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기만 한 모양이다.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돌아온 가이드가 분위기를 뛰우며 따듯한 사케를 잔에 채우기 시작했다.     


“싸인 좀 해주세요~(웃음)”     


술기운에 얼굴이 상기된 그녀가 수줍게 웃음 지며 사인펜과 종이를 내민다. 순간 그녀의 손이 내 손과 터치되었다. 타닥~ 정전기가 일면서 앞으로 그녀와는 운명적인 관계가 형성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일 귀국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간단히 술을 마시고 숙소에 왔다. 아쉬움에 숙소 앞 편의점에서 삿포로 맥주 몇 캔을 사 왔다. 그런데 맥주를 마시면서도 내 맘이 진정이 안된다. 그간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워해본 지가 얼마던가?


다음 날 아침, 가이드를 꼬셔서 그녀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귀국하기 전 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もしもし~”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황한 나는 어제 만났던 최호림이라 나를 소개했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아셨냐기에 가이드 친구분에게 물어서 전화를 했다고 말하니 잘했단다.     


“한국에 언제 들어오시죠? 그때 한 번 뵙죠.”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혀 내 연락처를 남기고 귀국했다. 즐겁고 설레던 여행을 뒤로하고 나는 멤버들보다 먼저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사실은 그녀를 생각하며 만든 곡을 급하게 작업하기 위해서였다. 고민 고민해서 작사 작곡을 했고 편곡을 끝내자 이 노래의 코러스 파트를 불러줄 후배 가수들을 호출했다. 그들은 인기 절정의 그룹 애프터의 신곡 타이틀곡을 먼저 듣는다는 설렘과 자신들 또한 이 곡에 참여한다는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모여있는 가수들에게 코러스 파트 악보를 놔눠 줬다.   

  

“선배님, 가사가 없는데요?”     


아뿔싸, 집에서 급히 나오는 바람에 가사를 적은 악보가 아닌 다른 악보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동경하는 선배 아닌가? 후배 가수들 앞에서 내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고민하듯 그들 앞에서 잠시 머리에 손을 얹고 생각하는 척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무슨 대단한 영감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술 술 술 막힘없이 가사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후배들은     


“정말~ 저 형은 천재인가 봐, 열라 멋지다…”     


탄성을 질렀다. 사실은 몇 날 며칠 밤을 생각하며 만든 가사인데, 그들 앞에선 현장에서 방금 급조해서 쓴 듯한 연출을 했다.


개인 휴식기를 끝나고 멤버들을 소집했다. 나는 이미 애프터 2집의 콘셉트를 잡았고 타이틀곡 작업을 했다 말했다. 멤버들에겐 각자 앨범에 들어갈 곡을 만들어 제출해 달라 요청했다. 그러자 드럼 치는 준철이가 화를 냈다. 네 맘대로 콘셉트를 정하고 곡을 만들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냐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까지는 밴드의 단합을 위해 참고 참았지만 그 녀석의 시니컬함을 이제는 도저히 참고 봐줄 수가 없었다. 녀석의 멱살을 쥐어 잡고 주먹을 날렸다. 다른 멤버들은 우리를 뜯어말렸고 냉랭한 상태로 우리는 헤어졌다. 결국 애프터 2집 작업은 1집과는 다르게 각자 곡 작업하고 믹싱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당시 준철이는 나를 스튜디오 복도에서 마주쳐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앨범작업 중 기타리스트가 상을 당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였다. 너무도 효자였던 그는 큰 충격에 빠졌고 2집 앨범 작업도 초반에만 참여하고 후반 작업은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곤 얼마가 지났을까? 한창 방황하던 그에게 전화가 왔다.     


“더 이상 못하겠다. 어머니가 안 계시니 음악을 더 이상은 못하겠다. 호림아…”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기타리스트는 우리 밴드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최고의 인기 기타리스트로 많은 가수들의 세션요청이 쇄도했지만 그는 그 모든 걸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해외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형, 마지막 연주 한 번만 해주고 떠나라…”     


앨범 발매 전 그의 공백은 내가 기타 파트 작업까지 해내면서 애프터 2집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어 발매된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이틀 곡을 한 공중파 방송에서 연주하고 밴드 해산을 결정했다. 이유는 기타리스트 형의 탈퇴도 상당 부분 영향이 있었지만 친구 준철이가 리더인 내게 통보도 없이 다른 밴드를 결성하면서 우리 팀에서 나가버리는 사건이 있어서였다. 그는 내게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너 만나고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네 매니저냐면서 사인을 받아도 되느냐? 묻는 사람들  이 있지 않나?


  원년 멤버인 나를 따돌리고 딴 놈하고 음반 작업을 하  러 일본에 가질 않나?


   나완 상의도 없이 네 맘대로 앨범작업을 하질 않나!

   더럽고 치사해서 너랑은 음악 안 한다! “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과거 고교 시절 SBS 오디션에 불참한 녀석에게 내가 그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내 딴에는 녀석을 유명 뮤지션으로 키워줬다생각 했는데 녀석과 나는 동상이몽이었던 거다. 해산된 밴드의 베이스기타와 키보디스트는 새로운 팀을 결성했다. 나도 그들의 앨범에 몇 곡 정도 참여했지만 준철이 덕에 멘붕온 나는 당분간 내 개인 음악을 하지 않겠다 소속사에 말하며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밴드가 해체가 아닌 해산이란 말을 쓴 이유는 언제든지 우리가 다시 모이면 애프터의 음악을 재계할 수 있다는 내 의지도 담겨있음을 멤버들에게 피력했다. 발매된 애프터 2집은 전국 투어 콘서트도 없었고 방송 출연도 없어서인지 초반 돌풍을 예고하며 순항했지만 대중에게 큰 반향은 이르키지 못했고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소속사 사장님은 나와의 계약 연장을 포기하고 내 밴드에서 활동했던 베이스 기타리스트와 키보디스트가 만든 새 밴드와 계약을 했다.


스포츠로 따지자면 난 자유계약 선수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간 밴드 문제와 음반작업으로 바쁜 나머지 잊고 지낸 그녀가 생각났다. 그리곤 그녀가 유학 중인 일본으로 떠나기로 했다. 내 일본행은 공식적으론 마스터링을 배우기 위한 유학으로 언론 보도가 되었고 팬들도 유학을 가는 나를 기다리겠다며 아쉬움과 응원을 동시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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