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권태 그리고 사랑
일본에 도착하니 로컬 가이드가 기다린다. 일본인 가이드 녀석은 민머리다. 탈모가 있는 건지 자기만의 스타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게 또 너무 잘 어울린다. 그간 한국에서 술에 취하면 이 민머리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이 녀석은 내가 왜 술만 취하면 자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차량에는 희원이도 함께 있었다. 나는 설레이는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며
"오랜만이다~"
말했다. 얼마 전 민머리 가이드의 소개로 만난 희원이는 입술과 보조개가 꼭 내 첫사랑 그녀와 닮아 있었다. 웃음 띈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반가워하는 그녀의 눈빛은 내가 과거 사랑했던 그녀의 얼굴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반 시즌을 일본에서 보내고 나니 희원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커플링 반지를 준비했다. 비싼 다이아 반지가 아닌 그냥 바닥에 굴리면 또르르르 굴러가는 금반지였다. 귀국하는 그녀의 기숙사에서 함께 짐을 싸면서 언제 이 반지를 끼워 줄지 고민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다음날 공항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간 사귀자는 말도 못 했는데 이대로 그녀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나 역시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형 동생이 된 민머리 가이드 녀석에게 그간 내가 머물던 일본 집, 내 짐들을 한국으로 보내달라 말했고 머물던 숙소까지 정리해주길 부탁했다.
다음날 공항에서 고국으로 떠나는 우리를 보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민머리 녀석을 뒤로한 채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속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며 인사를 했다. 물론 내 옆에 있는 그녀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리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비행기 안에서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귀자, 아니 결혼하자!"
라면서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줬는데 너무 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즈도 모르고 대충 구매한 내 실수였다. 하지만 내 실수로 민망한 나완 다르게 내 말을 듣고 있던 비행기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명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공개 프러포즈에 그녀는 물론 비행기의 탑승자, 승무원들 모두가 놀라며 탄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기장은 우리의 앞날을 축하한다며 기내 방송까지 했고 그녀를 위해 만든 애프터 2집의 노래까지 틀어줬다.
비행기에서 내려 게이트웨이를 통해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를 알아본 많은 사람들의 싸인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는 동안 희원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미리 마중 나온 부모님을 따라 먼저 집으로 갔다. 다음날 신문에 대서 특필되었다. “전 그룹 애프터의 리더 최호림, 묘령의 여인과 일본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각종 스포츠 신문에 열애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곤 희원이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난 오빠랑 사귄다고 한적 없는데요? 내가 언제 오빠랑 여행을 했어요?"
그녀는 화가 나있었고 순간,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게 그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도 나를 좋아할 거란 착각을 한건 나였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기숙사에서 지냈고 나는 내 숙소에서 각 각 지냈었고 그 흔한 스킨십 한번 없었다. 단지 그녀에 대해 알아낸 건 그녀가 마일드세븐 담배를 태우는 흡연자라는 사실 하나였다.
그녀의 일방적인 통보에도 나는 필사적으로 희원에게 들이댔다. 공개적으로 김병장님의 라디오에 출연해 독점 공개라며 나의 짝사랑을 말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결국 그녀는 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뭔가 나와는 결혼 못하겠다 했던 이유가 있는 듯했지만 나의 강력한 데쉬(dash)에 못 이기는 척 결국 프러포즈를 받아준 거다. 결혼식 당일 일본에서 민머리동생이 찾아왔다. 우리를 축하하러 온 그는 눈물을 글썽거렸고 자신이 소개한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감동이 되었는지 펑 펑 눈물까지 흘렸다. 착한 녀석,
“한국에선 중매를 해서 성공한 사람에게 양복 한 벌 해주는 문화가 있다. 내 곧 양복 한 벌 사주마.”
녀석을 위로했다. 그렇게 달콤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를 행복하게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간 내가 음악활동을 하며 벌어놨던 돈은 물론 저작권료까지 나에겐 무시 못할 돈이 있었지만 그녀와의 결혼 이후 모두 탕진되었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간 유학을 핑계로 놀아도 너무 놀았다.
음악 활동을 재계한다고 발표하자 여러 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하지만 내 전성기에 비해선 많이 줄어든 계약 액수들을 제시했다. 거기다 아내는 임신까지 했기 때문에 최대한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회사와 계약을 해야 했다. 과거 밴드 음악을 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고민하며 큰돈을 마다하던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음악을 하려 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음반 작업도 저렴하게 하고 싶었다. 명분은 Myself 작업이었지만 돈을 아끼려 홈 레코딩을 해서 마스터링만 좋은 곳에서 하려 했다. 마스터링도 해외에 나가서 작업하기엔 무리라 생각했다. 업체를 국내에서 수소문하던 중 전 애프터 키보디스트가 국내에도 해외 못지않게 마스터링을 잘하는 스튜디오가 있다며 업체를 소개했다. 업체 사장을 보고 놀라지 말라던 그의 말을 뒤로 한채 나는 곧바로 그 업체의 마스터링 기사를 만났다. 순간 너무 당황했다.
세상에, 그곳에서 마스터링을 하는 기사는 바로 준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함께해 왔고 결국 우리 팀의 해산을 주도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어 그를 본 척도 안 하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결국 마스터링은 국내 다른 업체에서 진행을 했다. 내 복귀 앨범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출시되었고 출시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흥행은 보장 못한다는 평론가들의 평이 나왔다. 이유는 바로 MP3의 등장과 2005년 등장한 애플사의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나노’의 대중화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