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라는 이름의 선택

나는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by 최호림

어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건 병원 복도였다.

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의사의 설명이 끝나자, 내 무릎은 저절로 꺾였다.

절망과 슬픔이 결혼해 또 하나의 비극을 낳는 순간 같았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몇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또 이런 시련이 닥쳐오는 걸까.


간병을 위해 아내와 나는 교대로 병실을 지켰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공기는 늘 차가웠고,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그 바람을 타고 병실을 가득 채웠다.


수술 이후 어머니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듯했다.

신앙에 더욱 깊이 몰두했고, 망설임 없이 시골 교회의 전도사의 길을 택하셨다.

교회 사택으로 이사를 가던 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네 신혼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축복처럼 들려야 할 말이 왜 그토록 작별 인사처럼 스며들던지.

어머니의 손을 놓는 내 손이 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없는 집은 유난히 텅 빈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일요일마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가 계신 교회로 향했다.

교회 마당에 서면 시골 특유의 흙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오래된 나무 벤치의 거친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공기 속에 퍼지는 동안, 어머니는 언제나 작은 미소를 띠고 계셨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우리는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야 했다.

신혼집을 처분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애증의 집을 팔았다.

아내가 가진 작은 건물까지 정리해 대출을 얹어 방 세 개짜리 집을 마련했다.

아이들에게 각자의 방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


이사 첫날, 거실 창으로 햇살 속 먼지가 반짝였다.

아이들은 자기 방 가구를 두고 옥신각신했고, 박스를 풀던 아내는 베란다 창가에서 나를 보며 웃었다.


“여보, 이제야 진짜 우리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아.”


그 얼굴에서 결혼 13년의 고단함이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우리는 잠시, 정말 잠시 신혼으로 돌아간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끊은 건 어머니의 전화였다.


“나를 오라 할 땐 언제고… 목사님이 갑자기 교회를 그만두라 하셨다.”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깊은 절망이 묻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숨을 돌리기 시작한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고, 동시에 갈 곳 잃은 어머니의 현실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연락조차 끊긴 형의 몫까지 결국 내가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어깨를 눌렀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와 함께 사시면 돼요. 걱정 마세요.”


아들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결심이었지만, 아내와 단 한마디 상의도 없는 결정이었다.

그 말이 아내에게 얼마나 큰 배신으로 들렸을지, 그땐 알지 못했다.


“차라리 빚을 내서라도 따로 집을 마련해 드리자.”


13년간 병든 시부모를 모시며 늘 뒷자리에 서 있던 아내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은 그녀의 마지막 방어선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내가 옳다고 믿었다.


결국 어머니는 새 집에서 큰아이 방을 쓰게 되셨고, 아이들은 작은 방을 함께 써야 했다.

그 순간에도 형은 없었다.


처음엔 어머니도 미안해했고 고마워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변했다.

교회에서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이 어머니 마음속 가시를 더 키웠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끓인 찌개를 드시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건 좀 짜구나. 내가 암환자인데… 쯧쯧.”


웃으며 대답하던 아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생활 전반에 개입했고, 아이들 공부까지 간섭했다.


그제야 알았다.

친절은, 아무리 부모라 해도 지나치면 당연함이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머니 편에 섰다.

아들로서의 도리라는 말이 내 눈과 입을 막고 있었다.


그럴수록 아내의 눈빛은 메말라갔고, 그녀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못이 하나씩 박혀갔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가족을 지키려다, 또 다른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작가의 기억이 배경이 되었지만 모든 인물, 사건, 지명은 저자의 창작적 산물이며 현실과의 유사성은 우연일 뿐입니다. - 최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