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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Dec 25. 2017

악과 아름다움의 평범성

영화 '한나 아렌트'와 드라마 '워킹데드'

최근 본 영화-드라마에서 두개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한 장면은 한나 아렌트를 다룬 영화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부분이고, 다른 장면은 미드 <워킹데드>의 주인공 부부의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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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를 다룬 영화는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악惡'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는 아렌트에 있어 사유의 문제를 간간히 언급하는데 아렌트에 대해 대화한 적이 없는 사람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듯 싶다. 또한 영화의 주제이자 '악'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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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행이 영화 말미에 아렌트가 '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요약하는데, 그 장면을 캡쳐했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고, 그의 행동 자체도 지극히 평범했다고 판단하는데, 이를 통해 악이라나 무엇일까 깊게 사유하게 된다. 그녀는 '선'과 '악'을 대비시켜 '선'은 근본에 있고, '악'은 평범에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 이 말은 '선'은 늘 '악'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쉽게 풀면 의도는 선한데 태도와 행동은 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악한 행동은 무섭다. 때론 악한 행동이 '선'을 '악'으로 물들여 근본적인 '선' 마져도 '악'으로 탈바꿈시킨다.

아렌트는 '악'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유'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근본에 아무리 강력한 '선'이 있다고 해도, 그 '선'을 계속해서 되묻는 이성적 사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없으며 인간은 언제든 '악'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현대의 정치들도 근본에 어떤 선의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결과는 늘 참담했다. 이 참담함을 '악'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사유는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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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워킹 데드>의 장면은 주인공 부부의 아들이 총상을 당해 죽을 위기에 닥친 상황에서 부부가 삶의 의미를 되묻는 장면이다. 아들은 잠시 깨어나는데 총을 맞기 전 눈을 마주친 사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아빠는 엄마에게 아들이 잠시 깨어난 순간에 고통이 아닌 아름다움을 얘기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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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살고 있을까? 무엇이 삶을 가치있도록 만들까. 현재 잔뜩 기대를 품고 읽고 있는 이어 모리스의 <가치관의 탄생>이 이 질문에 약간의 단서를 주리라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물론 여러가지 면에서 지적인 만족이 있다. 또한 덕분에 몇가지 통찰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삶의 옳고 그름의 근본적 판단기준, 즉 가치판단의 문제에 있어서는 별반 도움이 안된다. 그의 주장은 불평등과 폭력 등 삶의 부정적 측면을 어떻해든 합리화 시키려는 의도로 읽힐 뿐이다. 모리스의 주장대로 에너지 획득에 따라 가치관이 바뀐다는 주장을 수용하고 이해한다고 한들 내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설마 옛날엔 이해 못하고 맞았다면 이제는 이해하고 맞으란 의미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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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드라마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삶에 있어 명확한 단서를 주었다.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아이를 데리고 명동성당에 다녀왔는데 오늘은 유난히 성당이 아름다워보였다. 고딕양식이지만 화려하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로마네스크처럼 너무 건조하지도 않았다. 신자들의 얼굴도 너무 즐겁지도, 너무 경건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온화한 순간이었다. 아이는 성당의 모습과 성가를 들으며 즐거워했는데, 나는 이 건축과 미술양식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많이 이르지만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오겠다는 기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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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떤 아름다움을 보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진다. 홀로 떠난 여행에서 어떤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면 누군가가 떠오르곤 한다. "나중에 그/그녀와 꼭 함께 와야지!" 다짐하곤 한다. 혹은 여행에 다녀와서 그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 봐 나중에 꼭 같이 가자" 권유하곤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의지조차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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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이성민 선생은 "아름다움은 다시 보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한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 "아름다움은 누군가와 다시 보고 싶은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나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문장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최소한 지금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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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행위에는 양가적 측면이 있다. 바로 '악'과 '아름다움'이다. 아렌트는 근본에 선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다룬 아름다움은 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경험적 측면에서의 아름다움이다. 아렌트는 평범에 악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다룬 아름다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만약 우리가 평범한 삶에서 악이 아닌 아름다움을 택한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근본적 선을 성취하기 위해 평범함 악을 이용하기 보다 평범한 아름다움을 공유하려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근본적 선조차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투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손에 쥔 땀과 핏줄에 선 긴장을 풀고 온화한 미소를 짓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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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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