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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Jan 10. 2018

워킹데드

지난 몇주간 미드 '워킹데스'를 시청했다. 시즌 7까지 보고 나니 좀비 꿈을 꿀 정도다. 아주 재밌게 봤는데 그 이유는 최근 읽은 이어 모리스의 <가치관의 탄생>에 대해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었고, 앞으로 읽을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좀 더 생생하게 읽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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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좀비 드라마라기 보다는 인간 드라마다. 주인공이 자극을 쫓는 '좀비'가 아니라 정신을 바싹 차려야만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인간은 수렵채집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야생의 법칙에 따라 사유하고 적응해야만 하는, 그래서 앎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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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드라마는 생존 문제를 다루다가 점차 소규모 공동체 문제로 초점이 옮겨졌다. 20-50명 정도의 수렵채집+원시공동체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수렵 대상은 동물과 인간, 채집은 남겨진 물품들이었다. 원시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적 수월한 채집이었고, 같은 점은 비교적 풍요로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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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풍요도 오래 못간다. 집단이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드라마는 급격히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많이들 그만 본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느슨한 공동체'와 '끈끈한 공동체'의 차이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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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드라마는 이야기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 흐름은 거스르기 어렵다.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개인의 생존에서 공동체의 생존으로 그리고 농경의 출현과 함께 거대 집단의 형성과 번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을 이들은 어떻게 보여줄까... 사뭇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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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끈끈한 공동체에 비해 느슨한 공동체는 생존이 어려웠다. 왜냐면 느슨한 공동체는 개인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끈끈한 공동체는 상호 사랑을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 끈끈함이 어느정도냐에 따라 생존의 가능성이 달라졌고, 삶의 가치도 달라졌다. 이런 흐름은 드라마 작가들이 의식했기 보다는 작가들에게 강요되었다는 느낌이다. 드라마의 호흡상 이런 흐름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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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느슨한 공동체에 대한 느슨한 상상을 해왔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과연 느슨한 공동체를 공동체라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결국 사랑과 우정, 희생과 책임을 갖기 위해서는 상호적으로 끈끈한 연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처럼 그것이 꼭 가족일 필요는 없다. 그저 상대방과 함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기억이 있으면 된다. 그 추억이 나를 희생하고 책임지도록 움직인다. 그렇게 공동체는 더욱 끈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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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볼 것, 읽을 것이 천지다. 온갖 자극과 말 잔치에 시달리다보니 눈과 귀가 흐려지고, 생각이 빈약해지고, 기억이 희미해진다. 이런 자명함조차 의심하게 된다. 내 생각에 생존(=삶)의 문제를 정치(=경제)의 문제로 치환하는 순간 그렇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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