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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Jan 10. 2018

인연과 조언

며칠전 후배이자 제자인 친구를 만났다. 4학년을 앞둔 그는 인턴중인데 신기하게도 디자이너로서가 아닌 기자로서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만난 후 이상한 기분이 계속 든다. 왜냐면 그가 자신이 기자의 꿈을 갖게 된 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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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가 아니다. 신문사에서 일하고 미술기자라는 명칭을 갖곤 있지만 속칭 '기자'는 취재를 기반으로 한다. 반면 내 역할은 편집에 종속된 그래픽만을 담당하기에 엄밀히 말해 기자가 아니다. 그냥 그래픽디자이너일 뿐이다. 그러나 늘상 있는 곳, 만나는 사람들이 기자이다 보니 그들의 속성과 시스템은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난 15년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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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와의 인연은 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디자인과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릴레이 특강이 이뤄지는 수업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폭풍질문을 쏟아냈다. 나의 책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헤어졌다. 두번째 만남은 당시 야심차게 기획한 '디자인짝꿍' 세미나였다. 그는 내가 이끄는 팀에서 경청을 하고 있었다는데, 그날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친구는 내가 "앞으로 디자이너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으며 디자인을 배운다고 꼭 디자이너가 될 필요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진로를 확장시켜 생각해볼 여지가 생겼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기자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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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던진 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내가 던진 말이 옳지는 않다. 돌아서서 '아차' 할때가 한두번이 아니며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늘 허튼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할때는 당시까지 경험에 근거해 최대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래서 행동의 후회는 엄청 많을지언정 말의 후회는 별로 없다. 틀리면 항상 정정을 하며 그 과정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누구나 틀릴수도 있고, 다를수도, 실수할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에서 예민한 시절의 누군가는 크게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인지한 이상, 나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친구와 나는 약 7년의 시간차를 두고 상호적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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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방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두번째는 '속도'다. 방향이 정해지면 그 방향으로 전력으로 뛰면 되는데 너무 빨리 가면 못보는 것이 많고, 지치는 순간 "어?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며 오히려 방향을 상실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는 항상 적절해야 한다. 너무 빠르다 싶으면 제동을 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어떻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까? 그 브레이크는 바로 '본질'에 대한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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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를 꿈꾸는 후배에게 더 이상 해줄말이 없다. 난 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에게는 여전히 해줄말이 있다. 나는 잘하는 그래픽디자이너는 아니지만 그래픽 디자인 언저리에 있으며 이 일로 먹고 산다. 또한 하찮은 일일망정 거의 매일매일 작업을 한다. 동시에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며, 이를 교육과 접목시킨다. 여의치 않으면 글로 남기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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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그래픽 디자이너를 꿈꾸는 친구들이 반가워 자리를 청했다. 그들이 본질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꼰대가 되어 있었으며 대화는 허공을 돌고 있었다. 그때 사실상 절망했다. 현실을 얘기할땐 귀를 기울이고, 본질을 얘기할땐 귀를 후비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그러는 순간 현실적인 디자이너가 되며, 그러면 차라리 디자인을 때려치는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물론 다른 직업의 현실도 녹녹친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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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향과 속도를 의식하며 산다. 동시에 나의 역량을 고려한다. 방향과 속도가 일종의 가속도라면 역량은 질량이며, 이 둘의 곱이 나의 힘이다. 이는 그 유명한 뉴튼의 물리학 법칙(F=ma)이다. 이 말인 즉 방향과 속도는 나의 역량과 반비례한다는 말이다. 방향과 속도가 일찍 결정되어 너무 빠르게 나아가면 역량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인간의 힘이란 것은 결국 역량과 속도의 함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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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기자를 꿈꾸는 후배에게 "잘 생각했다"고 격려했다. 디자인을 배우고 기자가 되면, 속도가 늦은 만큼 더 좋은 역량을 갖게 될 것이라며.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면 결코 디자인'만' 공부하지 말라고, 남들보다 더 빨리 디자인을 잘하려 하지 말라고, 먼저 세상을 공부하고 본질을 깊게 파보고, 자신을 성찰하며 천천히 가라고. 30대에 성공하기 보다는 50대에 성공하는, 아니 죽기전까지 성공을 꿈꾸는 디자이너가 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래야 디자이너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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