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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Feb 08. 2018

 주체성과 푸념

오늘 오전에는 왠지 화가 많이 났다. 그냥 여러가지 일들이 모두 짜증났다. 화가 좀 식고 한숨을 내쉬니, 문득 옛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옛날에 정말 끝도 없이 화내고 그랬지. 지금은 노력하지만 한때 참 대책없는 인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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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싫었다. 언젠가부터 공부를 하면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 주체성. 주체성이 무엇인가? 이걸 알면 내가 나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주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을 상대화 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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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은 여러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과 발, 얼굴, 몸, 뇌와 심장 등의 신체와 나의 정신이 있다. 이 정신은 신체의 감각을 처리하는 기계적 능력이다. 이 능력은 기억으로 통제된다. 기억은 신비의 영역이다. 기억이 없으면 순간의 자극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역할이 있다. 직장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아들로서, 아빠로서,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그냥 지나가는 행인으로서 여러 상황이 나에게 역할을 부여한다. 다양한 맥락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아는 것은 정체성인데, 이 정체성도 나의 한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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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은 이런 나를 이루는 여러가지 모습들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 역할을 메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각 역할들에 있어 스스로 나 자신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공자의 정명(正名)과 비슷하다. 내가 군주일때 군주답게, 신하일때 신하답게, 아버지일땐 아버지답게, 자식일때 자식답게,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내가 나 자신을 상대화 시킴으로서, 몸과 마음과 역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주체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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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가령 갑자기 내 키를 키운다거나, 머리카락을 늘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탁한 정신을 맑게 하고, 오염된 생각을 건전하게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내 역할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주변인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성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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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어느정도 믿고 싶었다. 이런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주체성을 알면 어느정도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계속 공부를 하면서 나의 주체성을 더욱 분명하고 뚜렷하게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신이 부여한 신학이든, 데카르트의 철학이든, 칸트의 명령이든, 아렌트의 사유든... 무엇이라 불리든 그런 글들을 읽음으로서 나 자신을 상대화 시킬 수 있는 내안의 근본적 '나'를 더욱 자주 만나리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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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그런 믿음이 있다. 오늘 내가 화가 난 점은 이런 나의 노력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통해 내가 진짜 나를 만났다고 치자. 그러면 뭐?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내가 나를 혼자 만난다고 나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결국 다른 이들은 자기 자신을 상대화 하는 주체성이 아니라, 자신과 타자를 상대화하는 엉뚱한 주체성에 빠져 있는 것을. '나 자신에 대한 주체성'이 아니라 '너(노예)에 대한 주체성(주인성)'을 강조하는 상황을. 더구나 어떤 이들은 뻔뻔하게도 욕망이 주체성이라 거들먹거리는 세상이고, 많은 이들이 이런 사람을 더 신망하고 따르고 모방하는 세상인데... 나 혼자 진정한 주체성을 갖으면 결국 나는 이중의 주체성, 즉 주체성의 감옥에 갇히는 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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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모방. 어제는 이성민 선생님이 번역한 스캐리의 글을 읽었다. 그는 아름다움은 모방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름다움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포괄해 본질을 꿰뚫었다. 사물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아름답다고 느낄때 그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다. 그것은 그 사람을 모방하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때문에 아름다움은 삶을 더욱 생생하도록 만든다. 더 살아있고 싶도록 이끈다. 스캐리는 덧붙힌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착오에 빠져 있다고. 본질이 아니라 표면적인 것, 오래 지속되는 것보단 금방 증발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중시한다.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연예인 등의 외모와 브랜드를 모방하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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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감했다. 하지만 이내 동감하지 않았다. 왜냐면 모두가 착오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착오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스캐리가 말한 구체적인 아름다움의 발견은 야자나무 같은 생생한 삶의 자극이 아닌, 명품 브랜드나 자극적인 삶의 욕망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홀로 고고하게 주체적 아름다움을 찾아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함께 즐길수 있고, 어울릴 수 있는 이가 없는데... 결국 '자기 밖의 주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내 안의 주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수단으로서 이용해 먹을 것이 뻔한데... 문제는 자기 밖의 주체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런 상황을 모르지만, 내 안의 주체성을 추구하면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안다는 점이다. 그들은 더 지혜로운면서도 부당함을 알면서도 당해준다. 그것은 정말 고통스럽다. 밖에 있는 자와 싸우는 사람은 안에 있는 자신과 싸우는 이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뼈를 깍는 희생의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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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나는 고민한다. 이 글을 전체공개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나만보기로 둘 것인가...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전체공개로 할 것이 뻔하겠지. 습관은 무서우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나의 생각을 나의 글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다. 나아가 나의 삶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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