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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Mar 07. 2018

육아에세이 ; 그림그리기

나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어떤 가설을 가지고 있다.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이 반복적으로 순환한다는 아주 단순한 가설인데,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 순환은 '추상->구상->추상'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 경우는 그림을 오랜 시간 그린 사람에만 해당된다. 대부분은 '추상->구상'으로 끝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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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은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고, 추상은 그냥 슥슥 선을 긋거나 동그라미, 네모, 세모 등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통 그림을 잘 못그리는 사람은 추상적으로 대충 그림을 그리는데, 마음만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오랜 연습이 필요하기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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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 몇개를 마구 그어놓고 "아빠"라는 이름을 붙힌다. 아빠를 의도하고 그린 것인지, 그림을 그리고 아빠라고 부른 것인지 전후 인과관계는 확실치 않은데, 대부분의 그림은 선으로 그은 추상적 형상이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며 아빠, 엄마, 이모, 할머니라고 말하는데 보이는 상태로는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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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아이도 모를 것이다. 그림을 그리며 순간적으로 구분을 할뿐이다. 조금 뒤 그림에 대해 다시 물어보면 대답하지 않는다.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레고하자'라던가 '춤추자'라던가. 사실 문자를 모르는 아이는 논리적 대답을 못한다. 이는 문자를 모르는 어른도 마찬가지다. 문자를 모르면 떠오르는 대로 자신의 의도만을 말할 뿐이다. 구술시대의 대화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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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크레파스를 달라고 하기에 종이와 크레파스를 주고, 아빠를 그려보라고 말했다. 역시나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오! 이제는 제법 동그라미에 가깝다. 그래서 한단계 나아갔다. "아빠 눈을 어딨어? 코는? 입은?" 말을 하면 아이는 차례로 눈과 코, 입을 그린다. 언어를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것은 상징적 사고, 즉 문자를 익힐 준비가 되어간다는 의미다. 하지만 논리적 사고를 요하는 문자는 8살 이후에 배우는 것이 좋다. 이때는 숫자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튼 아이의 그림에서 눈과 코, 입의 형상은 구분되지 않는데, 공간적 위치는 제법 맞춘다. 전혀 알아볼수 없는 그림이지만, 의도를 알고 보면 제법 사람 얼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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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뇌과학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었다. "특징은 여러 개별 입력에서 공통된 부분이므로, 특징이 표상된 출력층은 입력층보다 한 단계 더 추상화된다"이다. 대부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밥이야'라고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통찰을 주었다. 우리는 개별 경험들에서 공통된 부분들을 찾아서 그것을 일반화 시킨다는 의미인데, 가령 "사람은 얼굴이 동그랗다"와 같이 사람 얼굴들의 공통된 특징을 추출해 추상화 시킨다거나,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처럼 역사적 사태를 어떤 사건에 압축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를 역사철학에서는 역사적 일반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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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우리 아이는 이제 제법 사람답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감각정보를 계속 축적하고, 그림을 그릴때마다 추상적 그림은 점점 구상적(사실적)으로 바뀔 것이다. 나아가 전문적 연습을 거듭하면 언젠가 극사실적인 경지에 이를 것이다. 그 순간 아이는 어떤 느낌일까. "아! 나는 이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라면서 붓을 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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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화가로 성장한 장년의 아이가 살아있는한 계속적으로 정보를 획득할 것이고, 그 정보는 추상화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극사실적인 그림은 점차 선 몇개를 슥슥 그려 사실과 유사하게 표현하는 효율적 방식으로 바뀔 것이고, 욕심을 더 부려 인간의 이데아를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놓고 "이것이 인간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잭슨 폴락 처럼 물감을 슥슥 뿌리고 "우리의 삶이 이렇다"라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상에서 다시 추상으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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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장년의 화가는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다시 추상으로 돌아온 이런 화가를 우리는 '대가'라 말한다. 우리는 대가들의 그림은 종종 어린아이의 그림과 유사하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아이의 그림을 놓고 대가의 그림이라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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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단어를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이는 순수하다. 추상적이고, 순수한 필치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그 순수함은 별반 가치가 없다. 반면 대가의 그림도 순수하다. 추상적이고 대범한 필치로 그림을 그린다. 이런 그림, 경지에 이른 선들을 보면서 '순수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같은 추상이고 비슷한 느낌이다. 가치는 전혀 다르다. 왜 그럴까? 다른 것이라곤 구상을 한번 다녀왔다는 것 밖에 없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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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밖에'가 아니다. 한 인간의 인생과 노력이 응집되어 순수하게 그려진 것이다. 그 그림이 별거 아닌거 같다면, 당신은 인간의 삶과 노력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기는 태도와 같다. 오래 살아본 이들, 오랜 시간 노력한 이들은 그것이 별거 아니라 말하면서도 그 별거 아닌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알고 있다. 지구, 태양 그저 멀리서 보면 별거 아닌 동그라미지만 그것이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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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의 그림을 보면서 순수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추상으로 구상으로, 한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순수하지 않다. 다시 추상으로 돌아오는 즉,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때야 말로 순수함에 이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순수함의 개념이 아닌 가치를 말하고 있다. 또 배웠다. 이런 점에서 육아야말로 정말 순수한 배움의 길인듯 싶다. 인생을 돌이켜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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