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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Mar 12. 2018

도시재생과 건축

출근길, 늘 돈의문 마을 정면을 바라보며 걷는다. 깔끔하게 정리된 건물들이 보기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영 마뜩치 않다. 오늘은 왠지 화가 났다. 무언가 상실한 기분이랄까. 빼앗긴 기분이랄까. 누가 나에게서 저 공간을 빼앗아 저렇게 말끔한 흉물로 만들었을까... 혹시 도시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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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무작정 개발'에 반발해 등장한 사업이다. 취지가 좋다. 낙후된 마을과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더 나은 삶을 살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도와준다. 그런데 그 도움이 달갑지 않을때가 있다. 바로 저 앞에 있는 돈의문 마을이 대표적인데, 언젠가부터 저곳에 아무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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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15년째하고 있다. 지난 10년동안 점심시간에 주로 가던 곳이 바로 돈의문마을이었다. 저녁회식도 종종 있었다. 그 마을 골목골목에는 오래된 식당들이 많았으며, 다양한 종류의 메뉴가 있었다. 오랜된 골목이고 오래 장사한 분들이라 정취있는 장소, 정감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점심시간 저녁시간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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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부터 이 공간이 공원으로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늘 다니던 곳이 사라지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분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고 근처 다른 곳에서 다시 장사를 하면 된다고들 하기에 그런가 했다. 그리고 몇번의 흉흉한 소문과 잡음,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결국 공원은 물건너가고 말끔하게 정리해 박물관 마을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렸다. 골목식당들이 하나씩 떠나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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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몇년이 지나니 플랜카드가 하나 걸렸다. '서울 도시건축 비엔날레' 오~ 이제 개장하나보다... 반가운 마음에 점심시간에 가보았는데 입장료를 받았다. 5000원 얼마 안되는 입장료이긴 하지만 산책 삼아 나온 걸음에 굳이 입장료까지 낼 필요까지야... 망설이다 그냥 돌아섰다. 그 이후로 일년동안 그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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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가 끝나자 간간히 보이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마을의 공간들은 임대가 되었다고 하는데 도통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광화문이 지척인 서울 중심에 있는 공간들인데 텅텅 비어있다. 분명 무언가가 입주해 있는듯 한데 이상하게 사람이 없다. 커다란 간판 '도시건축센터'만 눈에 띌뿐이다. 처음에는 그려려니 했는데 자꾸보니 그 간판이 눈에 거슬린다. 아니 이제는 꼴보기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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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것이다. 따지고 보면, 도시재생이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돕는 셈이다. 만약 그 도움이 실패하면? 도시재생 사업이 실패하면 누가 이익을 볼까. 이익을 보는 사람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이 일을 추진한 공무원들은 월급을 받았으니까. 결국 우리가 도와준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의 공무원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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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시민은 세금을 내고 정부와 도시를 구성해 서로를 돕는다. 물론 세금을 내는 나 자신도 도움을 받는다. 대부분 일상을 살기에 이를 전담할 사람들이 필요한다. 그들이 바로 공무원이다. 나태한 공무원을 감시하고 독려하기 위해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의원을 뽑는다. 대통령과 시장 등을 선거로 뽑아 공무원의 인사권을 관리한다. 국민이 공무원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현대 정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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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성토하고 싶은 대상은 공무원이 아니라 '건축'이다. 오늘은 유난히 그 단어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건축이 뭐길래' 왜 나를 이렇게 불편하게 할까. 왠지 요즘은 건축이 세상을 만들기보다는 망치고 있는 느낌 아닌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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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공간을 창출하는 활동이다. 건축은 건물을 짓는 것만이 아니라 도시를 구성한다. 자연공간을 인공적으로 바꿔 인간이 살아갈수 있는 삶의 공간을 재창출한다. 그래서 건축은 인류가 만들어낸 대표적 종합예술이다. 나는 그래픽디자이너지만 이 분야 또한 건축 분야에 일부이다. 마치 음악과 문학(가사)이 '춤'을 추기 위해 존재하듯이, 마치 바나나와 사과, 귤 등을 묶어 과일이라고 말하듯이 '건축'이란 단어 자체가 많은 조각과 회화 등 많은 예술 장르를 함축하고 관계하는 보편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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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건축은 독립된 분야가 아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결코 독립된 분야여서는 안된다. 건축은 구조와 시스템 그 자체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한다. 무엇을 위한 구조와 시스템인가? 즉 건축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와 그것이 모호해 졌다. 현대 모더니즘 건축은 철과 유리로 효율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일단 만들면 내용물은 알아서 채워졌기 때문이다. 공간이 모자랐지 내용이 모자란 적은 없었다. 경제학의 오랜 법칙.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이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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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들어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빈공간이 여기저기 생긴다. 원도심이 그렇고, 깡통주택이 그렇다. 건축가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건물이 후져서 그런가? 멋진 건물을 지어주면 다들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나겠지"라고. 주로 개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접근이 어느정도 통하는듯 싶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세금을 낭비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개발 중심의 건축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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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있는 건물을 잘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오랜 건물의 가치를 잘 활용하면 더욱 멋진 공간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오르세미술관처럼. 나아가 건물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위대한 건물은 도시라는 거실에 놓인 작품처럼 여겨졌다. 다른 도시의 그런 사례들이 나열되면 사람들은 귀가 솔깃했다. 우리 건물이 오르세미술관 같이 재생된다고? 그렇게 도시재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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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오르세미술관에는 미술품이 많은데, 우리가 재생한 건물에는 미술품이 없다. 즉 내용물이 없다. 내용물이 없으니 사람도 없다. 멋진 조명으로 비춰진 건물과 텅빈 공간만 덜렁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그것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멋진 조각 작품같다. 저건 분명히 건축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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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축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내용물이 없는 건축을 과연 건축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건축에도 케인즈 법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공간을 만들고 내용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용물을 구성하고 그 내용에 부합되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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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돈의문 마을의 과거를 생각해보았다. 왜 그때는 사람들 그토록 많았을까. 물론 거기에 멋진 건축은 없었다. 하지만 내용이 풍성했고, 다소 불편하고 무질서하더라도 개중 정감있는 집들이 있었다. 불편과 무질서를 이루는 오밀조밀한 집들은 덕지덕지 과거와 현재의 양식들이 중첩되어 묘한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사람이 있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모르지만 몇번 마주쳐서 익숙한 사람... 그럼 사람들이 모두 이 공간을 통해 무언가가 공유하고 세월을 함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런가 그 공간의 상실이 마치 나의 상실로 여겨지는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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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세기 건축은 저물어간다. 21세기 건축이 필요하다. 지난 200년동안은 건축이 도시를 만들고 시민들이 들어왔지만, 이제 도시의 주인은 시민이다. 삶의 공간이 되었다. 과거 사람들이 건축에 적응했다면, 이제 건축은 사람들에게 적응해야 한다. 건축은 이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사람들을(=내용물을) 쫓아내고 건물을 지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이(=내용물이) 있는 상황을 최대한 존중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즉 앞에 서기 보다 뒤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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