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중요한 시대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수도 없이 팔렸지만 과연 얼마나 그 책을 읽었을까. 누가 감히 그 책을 이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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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정의론을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공리주의와 칸트, 롤스와 아렌트를 이해해야 한다. 윤리를 중심으로 종교와 철학이 얽히고 얽힌 복잡한 관계에 근대 사회계약까지 결부된다. 그래서 홉스와 스피노자, 로크와 루소 등도 추가된다. 이걸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책 한권으로 될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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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좀더 쉬운 코스로 한자의 '의'에 집중한다. 내 책상에는 한자로 '의義'가 붙어있다. 한자로 '옳을 의'라고 말한다. 여기서 올바름은 바로 정의로움을 말하며 요즘으로 치면 'PC(폴리티컬 코렉트)'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앞선 물음에 대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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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의義'의 원래 표기는 '의宜'였다고 한다. 여기서 宜는 '마땅할 의'로 '마땅히 해야 하는...'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마땅히 해야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스스로 양심에 물어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려고 한다. 쉽게 말해 '상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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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宜가 義로 바뀌었을까... 어떤 분은 발음의 유사성에 의한 실수라고 지적하는데 사실 납득이 잘 안된다. 발음으로 헷갈리기에는 글자 모양이 너무 다르다. 필사과정에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고, 목판인쇄 과정도 마찬가지다. 목판을 파는 사람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기 때문이다. 활판인쇄는 다소 가능한 추측인데... 동양문화권에서 활판이 발명되긴 했지만, 도입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그래서 나는 실수라는 지적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학자도 아니고... 도무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냥 그려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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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나는 아름다움을 고민하면서 숭고와 '의'라는 단어의 관계에 주목했다. '군신유의' 왜 굳이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의義'를 붙혔을까... '마땅함=올바름=정의'이라면 어느 누구와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덕목이 아닌가... 그러다가 신하는 군주에 희생하는 관계라는 점에 착안해 여기서 '君'은 단순히 영웅적 왕이 아니라 신화적 왕 혹은 종교적 인격신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인류가 문명화되면서 신적인 존재에 무언가를 제물을 바쳐왔듯 '희생'이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까지 이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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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러니 하고 한달이 지나 문득 '희생'의 한자어 중 '희생 희犧'자가 '옳을 의義'자와 닮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희생 희자 앞에 소를 의미하는 부수가 붙어있고, 아래의 부수 '나 아我'자 아래에 '만万'자가 붙어있지만 크게 보아 두 글자의 모양이 유사하다. 모양이 유사하다는 말은 의미도 유사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宜가 義로 바뀐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수정, 즉 시대 상황이 변해 정의의 관점도 변한 것이다. 마땅함(宜)에서 희생(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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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사실은 나에게 '정의'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준다. 마땅함과 희생 사이 어딘가에 정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말로 쉽게 풀면 '마땅함=역할'과 희생=책임'이 될 수 있다. 정의란 역할과 책임 사이의 중용이다. 이를 문장으로 정리하면 "정의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 그것이 희생일지라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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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正名)으로 요약한다. 그 뜻은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등 요약하면 '~답게'를 말한다. 자신의 역할을 알고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면 그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란 의미다. 결론적으로 정의란 바로 '~답게'가 된다. 나는 이런 사실을 여러차례 필력했지만, 이렇게 정리해 보는 것은 처음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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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구분이 무의미한 세상이다. 정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사는 세상에, 마땅함과 희생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그릇된 구별짓기다. 그렇기에 우리식의 언어로 정의를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정의이며, 이 시대의 정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