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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03. 2018

두 가지 깨달음

오늘 아침 두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하나는 상대성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베트남에 대한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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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념을 설명할때 대립되는 쌍을 제안하길 즐긴다. 그래야 이해가 쉽고 소통도 정확해진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런 접근은 유용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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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알면 그것이 세상의 전부다. 하나에 대립되는 것을 알면 그것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게 된다. 둘은 서로 대립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서로의 개념을 한계짓는다. 물론 한계의 경계는 늘 모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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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아'라는 것만을 알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자체로 완성이요 전부다. 그런데 '어'가 생기면 '아'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발음시 '아'는 나가는 느낌이고, '어'는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아'와 '어'를 대립시키면 '아버지' '아빠'가 떠오르고, '어머니' '엄마'가 떠오른다. 이렇듯 하나의 소리에 다른 소리가 대립되면서 서로의 영역이 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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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속담은 하나의 측면만 알고 그것이 전부인듯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사람은 보통 융통성이 없다. 동시에 해법도 없다. 뿐만아니라 편가르기에 능해 반드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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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의 원리'는 사유요 대화다. 수학-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인문적 개념이며 성찰의 토대이다.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하나 속 둘'로 비유한다. 홀로 있는 나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우리 뇌는 둘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이 이 입장을 대변한다. 그래서 나는 나와 대화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유요, 사유는 곧 고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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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고 있을때 누군가 앞에 나타나면 나는 온전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 나와 다른 하나인 상대가 서로 마주볼때 '대화'가 시작된다. 즉 '대화'는 '사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즉 상대방이 없이 홀로 하는 대화가 사유요, 상대방과 사유를 나누는 것이 대화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인간이 악을 저지른 다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지 못하는 인간이 악에 둔감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늘 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상대성의 원리가 주는 자연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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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대립 쌍은 단순히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접근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선을 더욱 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이 있어야 한다. 적절성이 '완전성'에 머물지 않고 '더 적절성'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다양성이 요구된다. 그것이 대립 쌍이 진리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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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교수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데,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다가 하도 많이들 물어봐서 요즘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교수가 될수 있을까...?" 곰곰히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굳이 한국에서 할 필요가 있을까 교수가 될 수 있는 곳으로 가면 되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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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교수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유학을 권유하곤 했다. 그러던 차 오늘 오전에 베트남에서 오신 디자인과 교수님들을 만났다. 그래서 다짜고짜 물어봤다. "베트남에 가면 교수가 될 수 있나요?" 그러자 선생님 왈 "네 가능합니다!" 와우!!! 여러분 그렇답니다. 그쪽으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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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놓고보니503청년정책같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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