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철학적 문제를 하나 다뤄볼께. 요즘은 뜸하지만 몇년전에는 철학에 대한 포스팅을 자주 올렸어. 주로 동서양 철학자들이 제기한 질문과 답을 읽고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적는 글이었지. 그런데 이번엔 좀 달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철학이거든. 그래서 말투가 이래. 이해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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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은 이거야. “내가 지금 어떤 사람과 있는 것이 너무 즐거워서 좋아. 그럼 나는 그 사람이 좋은 걸까 아니면 즐거운 내 마음이 좋은걸까?” ‘좋음’에 대한 질문이라 플라톤 철학과 그닥 다르진 않지만 그래도 이 질문은 여전히 아주 의미가 있어.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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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질문의 대답이 궁금하다면, 그건 ‘너와 나’와 ‘내안의 나’의 두가지 상황을 동시에 인식한 거야. 사람은 뇌가 두개야. 좌뇌와 우뇌. 그래서 눈을 감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와 나의 대화가 이루어져. 그때 나와 나는 실제로 좌뇌와 우뇌라고 생각하면돼. 때론 대뇌피질과 변연계일수도 있고 혹은 정신과 육체일수도 있지만 편의상 좌뇌와 우뇌라고 하자. 아무튼 내 안에는 둘이 있어. 우리를 이를 ‘생각’이라고 말하고, ‘사유’ 혹은 ‘판단’ 좀 더 어려운 말로는 ‘이성’이나 ‘반성’이라고 말해. 때론 ‘고독’이라고 심각하게 말하기도 하고. 아무튼 사람들은 같은 현상을 다양한 언어로 말해. 그래서 언어는 참 재밌어. 게임같기도 하고 가족 같기도 하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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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가 아니라 ‘나와 너’인 상태에서 나는 하나야.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잖아. 너랑 같이 있는데 내가 딴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겠지. 그래서 너와 내가 같이 있를땐 서로에게 집중해야해. 대화할때는 나는 나와 만날 겨를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지. 인간의 이치가 그렇고, 사람의 도리가 그래. 어쩔수 없는 거지. 그래서 너와 나의 상황에서는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이란 표현을 써. 고독과 외로움은 느낌은 비슷하지만 달라. 고독보다는 외로움에 어떤 감정이 크게 묻어있거든. 고독은 뭔가 복합적이지만, 외로움은 감각 경험 자체가 부재한... 혼자있는 느낌, 같이 있어도 홀로 있는 느낌 그러니까 왕따 같은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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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가지 상황은 앞서 제기한 질문과 연관 있어. 사실 위 질문은 홀로 있는 상황과 같이 있는 상황, 즉 공존 불가능한 두가지 상황을 모두 포함한 거라. 우리는 대화할때 너의 이야기를 듣고 빠르게 판단해 내 생각을 말하잖아. 그래서 생각과 대화가 공존하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면밀히 따지면 둘은 동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순서적이거든. 먼저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서로. 다시 말하면 ‘너와 나’ 그리고 ‘나와 나’ 그리고 다시 ‘너와 나’가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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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실체와 개념이라는 철학적인 주제와 아주 밀접해. 실체는 감각과 감정을 느끼는 독립적 존재, 쉽게말해 감정적 경험이 가능한 존재야. 사람이나 동식물처럼. 개념은 일종의 언어로 사람들은 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도구지. 앞선 질문에서 ‘나의 즐거움’은 일종의 개념이야. ‘즐겁다’라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지. 반면 ‘너가 좋다’는 실체야. ‘너’라는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나와 너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있는 상태지. 이렇게 위 질문에는 개념과 실체가 동시에 있지만 현실에서는 개념과 실체가 늘 순서적으로 등장하지. 이걸 인식해야 생각이 엉키지 않고, 행동이 어긋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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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예술가 디자인을 구분하는 글을 쓰면 종종 그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 노력을 비아냥 거리는 분들이 있었어. 맞는 말이야. 실체적 상황에서만. 하지만 개념적 상황에서는 틀린 말이야. 둘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면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거든. 그러니까 회사랑 집이라는 개념을 혼동하면 회사갈때 파자마를 입고 갈수도 있어. 그래서 개념 구분은 중요해. 반면 실체에선 회사가 집일수도 있고, 집이 회사처럼 느껴질수도 있으니까. 딱히 구분되지 않지. 그래서 언어에서 실체적 접근보다는 개념적 구분이 훨씬 중요하지. 그런면에서 예술과 디자인의 개념적 구분은 아주 필요해. 그래야 디자인이 요구될때 예술을 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개념을 알면 분위기 파악을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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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민족, 이념, 회사, 학교, 예술, 디자인 등은 모두 개념이야. 우리는 이런 개념을 위해 나와 너라는 실체, 서로를 희생하곤 했어. 생각해보면 개념을 위해 실체를 희생한다는 것이 참 쓸데없는 짓이야.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즐거워야 좋은데... 희생은 고통을 수반하잖아. 게다가 그 고통이 죽음에 이른다면... 어휴 끔찍해 ㅠㅠ 고작 개념따위에 우리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니... 인간은 정말 너무 어리석은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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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도 곰곰히 따지면 끄덕여지는 면도 있어. 현재적으로 볼때는 개별적 실체가 중요하지만, 미래를 고려하면 즐거움이 마냥 좋지는 않거든. 불안할때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 불안을 떨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해. 이런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개념이고, 이 개념은 단순히 개념만이 아니라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를 포괄해. 여기서 우리는 바로 공동체야. 즉 개념은 보편적인 공동체를 가르키는 용어로 볼때... 즉각적 경험은 아니지만 어떤 아사무사한 감정이 묻어있기도 해. 때론 공동체를 향한 이 개념이 실체적 경험을 뛰어넘는 상황도 만들고. 지난20세기처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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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너무 심각해졌다. 다시 위의 가벼운 질문으로 돌아오자. “나의 좋음은 나의 즐거움일까 너가 좋아서일까?” 이건 선택의 문제야. 만약 나의 즐거움이 좋으면 나는 개념을 선택한거야. 개념은 나의 언어라 통제가 가능해. 반면 너가 좋다면 나는 너라는 실체를 선택한거야. 하지만 너라는 실체는 내가 통제할수 없어. 너는 너니까. 너가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맞지. 아니 당연하지. 물론 너가 나의 통제를 원한다면 내가 통제를 하겠지만... 그건 어느선까지만 가능할뿐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해. 나는 너를 소유할수 없으니까. 사실 나는 내 안의 나를 소유하기도 버겁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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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건. 권력자들의 추악한 행동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저들은 자신을 통제하기 버거워 남을 통제하려고 했구나... 자신을 소유하지 못한채 남을 소유하려 들었구나. 또 소유한 남을 쓰고 버리며 일회용품 취급을 했구나... (내 안의 나가 있다는) 개념도 없고, (너라는) 실체에 대한 공감도 없고... 공존과 순서 인식도 없고... 그냥 나약한 멍청이들이지. 나아가 어떻게 저렇게 나약하고 멍청한 인간들이 권력자가 되었을까... 우리 사회는 저런 자들에게 왜 권력을 주어 우리를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우리도 멍청하고 나약한 것일까... 뭔가 이상해. 우리 사회 시스템에 아주 심각한 버그가 생긴 기분이랄까. 이건 정말 심각한 버그라 재부팅 수준이 아니라 그냥 시스템을 밀어버리고 다시 깔고 싶은 심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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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작은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본질적인 의심을 가져오는것 같아. 난 처음엔 너라는 실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희생이라는 단어에 냉담했지. “개념따위에 실체적 인간이 왜 고통받아야 해!”라면서 지난 세기의 희생들에 분노해왔어. 하지만 요즘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서 어쩌면 미래 공동체를 위해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때론 그 개념의 변화가 초래하는 희생을 불가피성을 인정하게 되네... 그러나 역시 이 말은 잊지 말아야겠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는 말씀. 그래 개념에 따른 희생은 개념에 그쳐야지 사람을 악마화시키고 죽여선 안되. 그냥 죗값을 치르도록 해야지. 그래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수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