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여유있게 영화를 보았다. 한 3년만인가... 아무튼 누구나 보고 누구나 말하는 '기생충'을 보았다. 늦게 보아서 인지 아침 일찍 보아서인지 영화관은 한가했다. 덕분에 더 좋았다. 여유는 좋은 것이다. 게다가 이제 충분히들 보았을테니 스포일러 걱정 없이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 역시 여유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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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여유가 주제다. 여유있는 사람과 바쁜 사람들, 계급이라 말할 수도 있고 계층이라 말할 수도 있고, 계급의 테마는 착취이니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겐 계급보단 계층이 어울린다. 상황에 걸맞게 영화에는 계단이 많이 등장하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도 많이 등장한다. 어디에 속하냐에 따라 바쁨의 정도가 다르다. (참고로 가장 높은 곳에는 부유층의 자녀가 있다.) 위층은 내려갈 필요가 없어 다소 여유있고, 아래층은 오르내리느라 늘 바쁘다. 와이파이땜에 바쁘고, 사람들과 투닥거리랴, 일하랴 바쁘다. 심지어 비가와도 바쁘다. 반면 윗층에 사는 사람은 한결 여유롭다. 비가 오면 미세먼지도 씻기고 정취도 있고 좋다. 나는 영화를 보는내내 차라리 설국열차처럼 한 건물에 모든 상황을 배치하는 설명을 했다면 더 선명하고 좋았을껄...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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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포인트는 시스템이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견고해보이지만 아주 취약하다. 특히 요즘처럼 양극화가 심해지면 더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로 감정이 격해지고 돌발적 행동을 한다. 영화의 시스템도 처음엔 견고해 보였다. 모든 것이 술술 풀렸고, 아래계층 두 가족이 조우할때조차 잘 풀릴듯 싶었다. 그런데 박사장이 귀가하는 우발적 상황이 한차례 일어나자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닥친다. 마치 사단장님이 부대에 방문하듯 모두가 분주해진다. 작은 말 하나로 서로에게 증오심이 생기고, 사건은 사건에 꼬리를 물며 결국 생각지도 못했던 전쟁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결국 박사장조차 희생된다. 윗층의 대표가 무너지자 주인도 바뀐다. 물론 아랫층도 주인이 바뀐다. 영화는 서로 기생하는 시스템은 한번 붕괴되면 모두 끝장난다는 경고를 내포한다. 여기서 '끝장난다' 함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행위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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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발적 상황. 이것이 영화의 세번째 포인트다. 나는 체육관에 누운 기택(송강호)의 대사를 듣고 '계획'이 이 영화의 주제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디자이너라 계획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실로 영화 내내 계획을 강조하고, 계획대로 진행되는 상황과 우발적 상황을 동시에 보여준다. 여유있는 자들은 계획이 틀어져도 차선의 계획이 있지만, 여유없는 자들은 계획이 한 번 틀어지면 기회가 없다. 그래서 계획적 삶에 실패한 기택은 '무계획이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모든 것을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맡긴다. 결국 그는 무계획주의자답게 영화내내 우발적 상황에 처하면서도 꿋꿋하게 잘 산다. 반면 계획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의 짜릿한 맛을 모두 맛보게 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돌은 아들 기우의 계획을 상징한다. 돌을 쫓는 삶... 그 '돌'은 물론 '돈=금'이겠지. 젊은 기우는 아빠 기택과 달리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돌로 사람을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우며 돈을 쫓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계획의 상징은 돌에서 편지로 바뀐다. 동시에 그의 계획도 돈(=금)이 아닌 사람을 향한다. "아빠가 떳떳하게 걸어나오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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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영화는 여러 이야기를 하려 한다. 자녀 교육과 상태에 대한 부모의 몰이해. 능력보다 스팩에 집착하는 실태. 이런 것들이 얼마나 허상인지... 등등을 영화는 폭로한다. 아니 폭로하고 싶어한다. 이것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가는 재미요소다. 마지막으로 조여정에게 찬사를 돌리고 싶다. 그녀는 윗층과 아랫층, 고귀함과 천박함, 엄마와 아내 등 모든 계층을 오간다.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한다. 마치 노자(老子)처럼. 그녀의 능청맞은 연기력이 이 영화의 앙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