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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01. 2019

디자인에 있어서 '의지'라는 용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한방에 퉁치려는 경향이 있다. 학문영역에서도 그런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이미 우리 몸 자체가 앞뒤가 정해져 있듯 인간은 한쪽으로 편향되기 마련이며, 그것이 진화에 유리했던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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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쪽 방향을 정하기 전에 그 매카니즘에 대해 메타적으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1세대 인지과학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성=논리'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판단력의 기준이며, 인간의 본질이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라 믿는다. 나 또한 한동안은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데카르트주의자들이 상당히 편협한 관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비논리적인 사람들에 비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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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2세대 인지과학의 등장으로 인간의 사유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함께 진행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계몽주의과 낭만주의의 경계가 모호하듯 이성과 감성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과거에는 이성은 좌뇌와 전두엽에서, 감성은 우뇌와 변연계에서 등등의 구분이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쉽게 구분지을 문제가 아니다. 일례로 19세기 전두엽을 다친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례를 볼때 그는 전두엽 손상 이후 논리적인 행동을 잃어버렸는데 동시에 감성적인 사회성도 동시에 잃어버렸다. 괴팍해진 그는 현명한 판단력을 내릴 수 없었다. 즉 인간의 뇌=신경 구조(패턴)은 이성과 감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인간은 둘의 억제-상호작용에 의해 판단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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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리는 초딩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이성이 세요? 감성이 세요?" 대부분 이성이 세며,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믿었고, 근대 이후 지금까지 자신들이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감성이 훨씬 세다. 모든 판단은 기억에 근거하는데 그 기억에는 감정이 묻어 있다. 즉 감정 없는 판단은 불가능하다. 인지심리학 용어로 '인지적 무의식'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인간의 의식적 인식이란 무의식의 합리화 혹은 무의식의 재평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나는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의 존재가 정설로 여겨진 이후 뇌과학은 그 발견을 합리화 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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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참으로 멋진 문장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생각이 논리적 이성이며, 논리적 이성이 나를 지배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것은 플라톤이 인간 사유를 머리와 가슴, 배로 구분하고 머리가 젤 중요하며, 머리가 좋은 사람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생각은 오만과 편견을 낳는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 보다는 자신에 대한 존엄과 자만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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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관계를 은유론을 통해 제대로 포착했고, 위에 나열한 도식들 또한 우리 경험(신경패턴)에 근거한 은유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상대에 대한 존중, 공감, 감성의 중요성을 더욱더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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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모든 것을 한방에 퉁치려는 편견이 사라진다. 이런 점은 디자인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데, 지난주 디자인학교 학생이 귀취와 귀납, 연역에 대한 내 강의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고민을 토로했다. 나는 이성과 감성의 주제가 다르다는 말로 대답했다. 귀납과 연역은 답을 찾는 전형적인 지성적 과정이다. 다양한 경험으로 일반화를 시키고 그 일반화로 결과를 판단한다. 나는 귀납과 연역 사이에 귀추를 말했는데, 이 귀추가 상당히 중요하다. 감성에 있어 귀추는 절대적인 사유다. 가설적 추론인 귀추는 귀납과 연역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기본적인 방향을 주는데 말 그대로 감성적인 가설적 판단이라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디자인 과정은 귀납이나 연역이라기 보다는 귀추에 가깝다. 마치 경제학이 '선택과 포기'이듯, 디자인도 포괄적 해결책인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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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귀납과 연역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언어구조가 귀납과 연역 구조로 은유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 바나나, 사과...등등을 일일히 말하기 보다는 '과일'이란 단어로 말하는게 효율적이다. 이 과일이란 추상적인 단어가 생긴 것은 귀납적 과정이다. 과일이란 말을 하면서 다양한 과일들을 상상하는데 그것이 연역적 사유다. 이렇듯 우리 언어가 귀납-연역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현실의 사회적 판단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알기론 '수학'이란 학문빼고 그럴 수 있는 학문이나 현실은 없다. 디자인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과 예술을 지성과 단절시키고 이성이라 말하곤 했는데... 그날 이후 나는 이성이란 말도 자제하고, '의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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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늘 즐겁다.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이 대화는 서로에게 큰 이익을 준다. 지금의 나 또한 그렇다. 지난주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고, 일주일 내내 그 대답을 곱씹는다. 이런 점에서 질문은 질문자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답자에게도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질문을 잘 안한다. 질문보다는 질타, 질시가 난무할 뿐. 하긴 질문할 만한 내용도 빈약하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의 의지가 뿜뿜 뻗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디자인 분야에서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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