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정치학은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 그렇기에 늘 자연상태(신체=욕망)를 우려한다. 그래서 정의나 사회계약 같은 인공물(쿤스트)을 강조한다. 인공상태는 좋고 자연상태가 나쁜건 아니지만...인공상태는 정치에선 아주 중요하다. 정치는 정신의 지배를 위해 '자유의지' 개념을 발명했다. 현대 생물학적으로 '자유의지' 존재는 부정되지만 '자유의지'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 문제는 존재와 당위, 즉 사실과 가치의 균형을 어디즈음에서 잡으면 좋으냐이다. 이 문제는 '열린 역동적인 연결되고 복잡'한 난제라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조급하게 결과를 다그치기보다는 깊게 고민하고 가볍게 행동하고 천천히 개선하는 과정을 음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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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그 유명한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어차례 읽고 '정의'의 문제를 늘 고민한다. 플라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원초적 논쟁과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칸트의 <실천이성>, 롤스의 <정의론>, 스캐리의 <아름다움과 정의로움>까지 인간사회가 생긴이래 정의=공정 문제는 늘 고민거리였다. 19세기 다윈의 '자연선택'과 20세기 양자역학과 21세기 복합계가 등장하며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정의를 논할 수 있으며, 그 기준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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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역사는 디자인된다>에서 칼 포퍼의 입장에 동의했다. 그는 '열린 사회'에서 정의의 기준을 내세우고 이를 강요하는 사람을 '적'으로 보고, 플라톤과 헤겔 그리고 그가 존경하는 마르크스까지 '적들'로 규정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너무 복잡하기에 눈앞의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야지 절대적 객관적 목적을 세우고 그 외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난 디자이너이기에 다소 목적론자에 가깝지만, 그의 해법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 맥락에 맞는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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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가장 큰 문제는 '희생'이다. 거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그 목적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나는 이 태도가 정의의 가장 큰 문제라 생각한다. "왜 내가 당신의 목적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신에게도 향한다. 나 또한 나의 목적을 위해 타인에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희생은 본인의 목적을 위한 것이지 누군가의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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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또한 애매한 구석이 있다. 부모는 항상 "다 너의 미래를 위해 그러는거야"라며 아이에게 공부경쟁을 요구한다. 아이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욕망을 교묘하게 감춘채. 하지만 그 승리가 온전히 부모의 승리만은 아니란 것을 잘 알기에 자식은 어쩔수 없이 부모의 말을 따른다. 나는 이 교묘한 수법이 인류가 생긴이래 늘 있어왔다는 생각이다. 칸트가 기발한 착상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효과는 없는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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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너무 복잡하기에 오히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 눈앞에 나와 가깝게 있는 사람을 아끼고 공감하는 것. 현재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깨끗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양심과 도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 언젠가 닫힌 사회의 빗장도 풀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