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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Oct 02. 2019

진보와 공정

오랜 '진보-보수'의 프레임에서 '공정-불공정'의 프레임으로 담론이 바뀌고 있다. 진보와 보수가 무엇인지 잘 모른채 상대방을 진보와 보수로 편가르기를 했듯이, 공정과 불공정이 무엇인지 잘 모른채 공정과 불공정으로 편가르기가 시작되었다. 이분법은 편가르기 하기 참 좋은 프레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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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진보는 바꾸는 것이고, 보수는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진보와 보수적 태도가 바뀔 뿐, 사람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갈리지 않는다. 공정과 불공정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그 사람이 공정한 사람이냐 불공정한 사람이냐는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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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프레임의 차이는 불평등과 불합리이다. 진보와 보수는 평등의 문제를 다룬다. 그래서 성장과 분배를 놓고 싸우는데, 보수는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원한다. 전통적으로 진보는 기계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원했기에 다소 불합리한 측면이 있어도 불평등을 타파하려 한다. 그래서 진보가 주장하는 정책은 복지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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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공정-불공정 프레임이 강조하는 것은 기준이다. 기준과 규칙이 합리적이라면 불평등도 용인된다. 즉 공정과 불공정은 불합리 문제를 다룬다. 합리적인 과정이라면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합리하면 평등도 용인되지 않는다. 노력도 안하고 감히 나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또한 아주 오랜 프레임으로 이를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라고 말한다. 주로 중국과 이슬람 사회에 있었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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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프레임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둘은 날줄과 씨줄의 관계다. 진보를 날줄로 두고 공정을 씨줄로 엮으면 된다. 거꾸로 해도 상관없다. 아무튼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변화해야만 살수 있다. 다만 진보(프로그레스)와 진화(에볼루션)는 다르다. 어쩌면 보수는 진보보단 진화에 가까운 태도다. 바꾸려는 진보는 적응을 잘 못한다. 반면 지키려는 보수는 적응을 잘한다. 결국 생명은 항상성을 지켜야 하기에 보수적 태도가 안정적이지만 보수에 안주하면 상황이 바뀔때 위험하다. 궁하면 변해야 한다.(궁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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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불공정도 마찬가지다. 공정이 엄청난 양극화를 초래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불공정하다. 다소 불공정하더라도 변화를 위해서라면 희생이 요구된다. 극단적으로 전쟁이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감행하는데 이는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기에 불공정을 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공정이 극단으로 가면 그 또한 위험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난 한국전쟁에서 500만명을 희생시켰을까. 세계는 무엇을 위해 지난 1-2차 세계대전에서 6000만명을 희생시켰을까. 희생에 비해 얻은 것이 초라하다면 불합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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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0년대 학번이지만 90년대 생의 마음을 이해한다. 90년대 학번은 낀낀세대로서 극단적인 불공정을 느끼진 못했지만 불공정의 희생양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90년대 생은 극단적 불공정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즉 이제야 날줄에 씨줄이 끼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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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시끄럽고 혼란스럽다면 그것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 사회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빨리. 지난 수년간의 감정분출을 보면서 내면화된 억압에서조차 벗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개인으로서는 이미 오래전 해방되었지만 집단으로서는 아직 노예상태다. 지금 우리는 집단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주인으로 거듭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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