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교에서 은유수업을 한다. 학생들의 과제를 서로 공유할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구글 설문을 생각해냈고 이를 소개했다. 소개하다가 문득 유튜브에서 방송한 바우하우스를 보여주려고 유튜브에 들어갔다. 뜨악! 내 아이디로 된 메인 화면이 화끈거리는 민망한 썸네일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 장면이 그대로 빔으로 크게 보여지고 있었다. 순간 학생들의 당혹스런 표정이 스치고 공황상태에 빠진 나는 얼른 화면을 빠져 나왔다. 수업은 어찌어찌 끝냈지만 그 여운은 여전히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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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치고 이 사건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천천히 복기하다보니 비슷하게 수치스런 장면이 두개 더 생각났다. 첫째는 중학교 2학년때다. 친구 3명이서 종종 비디오를 빌려봤는데 그날 한 친구가 성인영화를 빌리자며 우리를 종용했다. 급기야 노안인 그 친구가 비디오를 빌렸다. 그 비디오를 비어 있는 우리 집에서 보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들어왔다. 당황한 우리 셋은 비디오는 놔둔채 방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영상에서 들리는 묘한소리와 아버지의 발소리가 뒤섞였다. 우린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진듯 서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혈기있는 농고 선생님이셨기에 끝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테입을 빼서 방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테입 모서리로 우리 머리를 톡톡 치시며 "이런 걸 못보게 하는 이유는 니들이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테입을 내 책상위에 놓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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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30대 중반이다. 선배들과 야한 농담을 주고받던중 나보고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 야동을 보냐며 물어봤다. 나는 중딩 사건이후로 야동공포가 있었기에 소장하는 야동이 없다고 말했는데 자꾸 구해오란다. 그래서 후배에게 요청해보겠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꽤지나 답장이 왔다. "여경씨 저한테 왜 이러세요?" 헉! 와이프였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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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장면은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 최상위에 랭크되어있다. 그 순간순간이 또렷히 기억될 정도로. 그런데 문득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이토록 크게 수치스러워 하는걸까? 어떤이들은 이런 것에 관대한 반면 어떤이들은 왜 스스로에게 이렇게 엄격할까. 위선과 솔직함, 억압과 자유의 중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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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철학의 아버지 성 어거스틴은 세가지 욕망을 금한다. 식욕, 색욕, 권력욕이다. 경쟁과 전쟁을 초래하는 대표적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족쇄는 꽤 효과적이었는데 중세 전성기에 권력욕은 명예욕으로 해방되었다. 마이키밸리 이후 권력명예욕은 오히려 장려되었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사회가 되었다. 각종 사회계약이 등장해 이 투쟁의 섬세한 기준이 생겼을뿐 투쟁은 여전히 장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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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한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식욕이 해방된다. 지금은 배고파서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팩트풀리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인구가 이렇게 급증한 이유가 '죽지 않아서'라고 강조한다. 죽지 않는 원인은 의료기술의 발전 덕택이지만 먹을 것도 크게 한몫한다. 다이어트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현대인은 너무 먹어서 문제다. 거리의 수많은 뷔페는 더이상 식욕이 금욕의 항목이 아니란 결정적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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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색욕이다. 앞서 나의 사례에서 보았듯 색욕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금기로 작동한다. 최근 이를 해방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소외된 약자들의 성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각종 성인용품이 권장되고, 급기야 인형과 로봇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나 또한 수많은 수치스런 사건중 위 세가지 헤프닝을 최상위로 꼽는 것을 보면, 나의 내면에서 색욕이 얼마나 억압되어 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과연 색욕은 권력욕과 식욕처럼 해방되고 권장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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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 고민으로 머리가 아프다. 일단 결론은 부정적이다. 두가지 이유를 들면, 첫째는 색욕은 사람과 사람의 1:1 관계이기 때문이다. 권력욕은 1대 다수의 관계라 덜 부담스럽다. 식욕은 사람과 사물의 관계다. 둘 모두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잘 은폐되어 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색욕은 거의 정확히 1:1이 작동하기에 이 은폐가 적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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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가 결정적 이유인데, 색욕은 번식과 직결된다. 요즘은 콘돔과 약물이 개발되어 쾌락의 일종으로 여겨지지만 유전자에 새겨진 번식 관념은 어쩔 도리가 없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이기에 가장 조심스럽고 가장 고귀한 욕망이 색욕이다. 그렇기에 색욕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때 우린 가장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색욕은 본질적 특징상 널리 권장되는 욕망이 되기 어려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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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은유론에 빠져 있다. 은유의 본질을 파고 들다가 급기야 인간의 몸에 이르렀는데,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은 먹고 싸는 대사과정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먹어야 살수 있다. 잘 먹으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이기면 번식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이지만 나에게 너무나 강렬해서 모든 것이 허무할 정도다. 인간의 삶이 박테리아가 살아온 진화 방식과 별 다르지 않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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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있었던 은유 수업 주제는 '재미'였다. 한 학생이 재미를 슬픈얼굴에 비유했다. 나는 너무 크게 공감해서 장황하게 최근 내 감정을 말해버렸다. 수업에선 주로 논리적 사실만 말하는 나로서는 이례적이다. 마치 이 글처럼. 기왕 말 나옴김에 털어놓으면 나는 요즘 공부의 파국을 맞고 있다. 공부가 나를 고귀한 인간으로 올려줄 것이라 확신했는데, 은유론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욕망이었는지 근본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토록 재미었던 공부가 슬픈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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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건은 수치스러웠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와이프의 훈계가 나를 엄격의 길로 이끌었듯이 이번 사건으로 나는 새롭게 깨달았다. 왜 어거스틴이 또 싯타르타가 식욕과 색욕 그리고 권력욕을 족쇄에 채웠는지. 그 족쇄가 풀리는 순간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게 되었다. 슬픈얼굴 다음엔 관대해지고 욕망에 충실하다가 그 선을 넘어 변태가 되고 범죄자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어제의 사건이 고맙기도 하다. 나는 성인들의 책을 읽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나무(마니교) 아래에서 무화과나무(그리스도교) 아래로 가는 어거스틴의 회심을 이제야 약간 짐작하게 된다. 박테리아적 인간이 아닌 신적인 인간을 지향했던 성인들의 회심을. 수치심이 주는 그 효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