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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Oct 07. 2019

[은유론2] 고귀함의 양면성



어제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원주에 가는 길에 '수치심과 회심'에 대한 글을 한편 썼다. 보통은 글을 쓰고 디테일을 다듬으면서 사유가 어느정도 정리가 되는데, 이성민 선생님과 귀한 댓글을 주고받으며 사유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이 댓글이 유독 반가웠던 이유는, 은유에 대한 나의 사유가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슬픈얼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걱정하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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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내고 올라오는 길에 파국을 면할 단초를 하나 찾았다. 성민샘은 은유가 지닌 '고귀한' 길을 두가지 제시해 주셨는데, 덕분에 나는 고귀함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고귀함'의 원인을 좀 더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적 고귀함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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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식욕과 색욕을 그 원인으로 찾았고, 권력욕이 명예욕으로 전환되어 인간의 경쟁을 유발시킨다고 생각했다. 식욕은 해방되었고 색욕은 여전히 감옥에 있는데 색욕의 탈옥시도는 여전히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시대의 욕망추구가 어떤 파국을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신적 고귀함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귀함은 식욕과 권력욕을 다시 감옥에 가두는 역할을 하려는 것은 아닐지... 그렇지 않으면 그저 박테리아적 생존과 번식에 봉사하는 권력지향형 몸만 남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고귀함도 욕망을 다시 가둠으로써 새로운 권력을 차지하려는 가면이 아닐지... 마치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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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공리주의 사회에서 이런 관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새로울 것도 없는 자괴감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명예욕은 권력욕과 뉘앙스가 묘하게 다르다. 어쩌면 이 명예욕에 고귀함의 가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권력욕은 대놓고 식욕과 색욕을 탐하지만, 명예욕은 절제를 안다. 경쟁의 룰을 지키고 욕망을 공정하게 배분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성인들은 권력욕을 감옥에서 교화시켜 명예욕으로 석방시켜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식욕까지 탈옥해서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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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가 생각났다. 그는 재밌는 사례를 들어 우리 인식의 벽을 밝혀낸다. 술 취한 사람이 왼쪽 건물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간다. 오른쪽 끝은 절벽이다. 술취한 사람은 오른쪽 왼쪽으로 비틀거린다. 그가 절벽에 떨어질 확률은 몇 %일까? 나는 가끔 이 질문을 수업에서 하는데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고민한다. 답은 간단하다. 100%이다. 왼쪽은 벽으로 막혀 있으니 그 사람은 언젠가 오른쪽 절벽으로 떨어질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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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은 이런 인식의 벽에 막혀 한쪽 방향의 진화만을 생각한다. 즉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가는 진화만을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생동물에서 포유류까지의 진화 방향을 인식하기에 포유류는 원생동물보다 더 고귀한 동물로 여긴다. 그러면 포유류 중 가장 복잡한 동물인 인간이 가장 고귀한 동물이 된다. 그리고 인간중 가장 복잡한 뇌를 가진 사람이 고귀한 성인이 된다. 이 도식이 '정신적 고귀함' 추구라는 인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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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는 책 전체에서 인식의 벽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특히 4번타자가 생길 확률을 읽다보면 너무나 흥미로워서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잃어버릴 정도다. 아무튼 그는 기생충의 예를 들어 진화의 방향은 복잡성이 높아지는 방향이 아니라 단순성이 높아지는 방향도 있음을 증거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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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순함의 끝을 인식의 벽으로 두고 있기에 항상 복잡성이 높아지는 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진화는 원생동물 앞에 수소 탄소 같은 화학물질이 있고 원자가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 쿼크, 힉스.... 단순해지는 방향도 있다. 즉 아래에 소개된 그래프처럼 복잡해지는 방향만이 아니라 단순해지는 방향까지 있는 종모양의 그래프가 맞는 것이다. 나는 이 그래프가 생각나면서 진화가 그렇듯 인간의 인식과 삶, 고귀함에도 한쪽 방향이 아닌 양쪽 방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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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그래프는 사회학이나 경제학 등의 사회경제모형에서 흔하게 등장한다. 진화론과 철학이 한쪽 방향을 보고 있을때 사회학과 경제학은 양쪽을 다 보고 있었다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나는 우리가 인식의 벽 너머 단순함의 가치를 알때 복잡함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을 감옥에 가두고 정신적 고귀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한쪽 방향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여기에 생채기를 낸 마르크스가 형이상학에 저항해 형이하학을 강조한 것을 아닐까. 물론 그가 이런 도식까지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굴드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에서 둘의 연결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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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정신의 고귀함만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은유론을 접하고 인식의 벽이 무너지면서 본능적으로 그 고귀함의 파국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얼굴이 슬퍼졌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욕망'이라는 고귀함의 새로운 대륙을 찾았다. 아직은 그 고귀함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박테리아에서 인간까지 펼쳐진 정신적(=신경적) 고귀함의 끝없는 지평처럼, 욕망의 고귀함도 끝없는 지평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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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복잡성이라는 방향만을 볼때 '욕망=몸'을 가두었듯, 단순성이라는 방향만을 볼때 '도덕=정신'을 가두게 될 것이다. 즉 욕망의 고귀함은 자칫 거대한 도덕적 파국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두 방향을 모두 감옥에 가두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진정한 고귀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게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권력은 내려 놓았지만 식욕과 색욕은 맘껏 추구한 퇴계 선생처럼 유교 사회의 일부 지배계급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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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렵다. 결국 인간은 생긴대로 한쪽만을 바라보고 살아가 하는 것인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여기까지 생각에 이른 것이 어디인가. 일단 위기의 함정 하나는 피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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