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디자인된다>에서 제안한, 2017년은 417년과 가장 닮았다는 나의 가설에 점점 확신이 더해진다. 이 말은 우리 시대가 로마의 말기이며, 종교적으로 영성화 되는 시기이며, 이미지가 중요해지는 시기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말해 중세 초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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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읽기 시작한 닐 포스트먼의 <사라지는 어린이>는 나의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어린이가 사라지는 현상은 문자매체에서 전파매체로의 이행, 즉 개념에서 이미지로의 이행과 맞물린다.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가 과거에도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중세이다. 암흑이 아닌 온갖 화려한 도상(이콘)이 정신을 지배하던 그 중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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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북방 야만인들의 침입과 로마제국의 멸망, 그리고 고전문화의 종언, 이른바 암흑의 중세로 불리는 유럽에로의 전락 등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네 교과서는 특히 어린시절과 관련이 있으나 자주 간과되고 있는 네가지 문제만을 예외로 한다면 그러한 이행을 제대로 충분히 다루고 있다. 그 첫째는 읽고 쓰는 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육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셋째는 수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넷째는 이 세가지가 사라진 결과로, 어린시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중략)
헤빌록은 이렇게 썼다. "어떤 종류든 서예 취미란 '특수기교적 문자'를 조장하며 특수기교적 문자는 또 서예 취미를 조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사회적 문자'의 적이다. 중세 암흑시기를 통해서 드러난 그리스 문자와 로마문자의 불우한 운명이 이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유럽에서 발생한 일은 알파벳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한 독자들의 해득능력이 사라졌던 것이다. 해빌록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보자. "실제로 유럽에서는 한동안 글읽는 사람들의 조건이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이전의 조건과 비슷한 상황으로 되돌아 갔다."
<사라지는 어린이> 닐 포스트먼 23-24p
위 인용글에서 보듯 닐 포스트먼은 헤빌록의 말을 빌려 로마에서 중세로의 이행에 있어 문맹률이 높아지는 현상을 꼬집는다. 이 현상이 교육을 사라지게 하고, 어린이와 어른의 구분을 사라지게 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정보력의 격차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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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헤빌록이 구분하는 '사회적 문자'와 '특수기교적 문자'이다. '사회적 문자'의 의미는 문자 해득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특수기교적 문자'는 소수의 서기들 특권 계급만이 제한적으로 문자를 알고 있는 조건이다. 헤빌록은 특수기교적 문자 사용이 높아지면 사회적 문자, 즉 문자해득력이 낮아진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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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글자의 이미지성에 천착할수록 문맹률이 높아진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것이 문자의 불우한 운명인 것이다. 읽히지 못하고 보이기만 하는 글자의 운명이라... 하긴 그렇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에는 늘 가독성이 화두에 오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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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블록은 익숙한 이름이다. 나는 예전에 그의 <플라톤 서설>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국가>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국가>를 정치텍스트가 아닌 교육텍스트로 읽고 있으며, 구전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을 논증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후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분기점을 다시 관찰하게 되었고, 왜 안티스테네스이고 왜 플라톤인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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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알라딘 중고로 딱 한권 있었는데 간신히 낚아챘다. 30만원을 줘도 아깝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한 보물을 무려 3000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