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러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여경 Nov 18. 2019

과학과 인문학

요즘 들어 꾸준한 과학책 독서의 덕을 톡톡히 본다. 특히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언어학을 만나고부터 그렇다. 진화론, 뇌과학, 신경학, 특히 복잡계 과학인 생물학 지식은 은유적 언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디자인은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행동이 모두 요구되는 독특한 분야다. 덕분에 나는 과학과 인문학을 동등한 위상으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양쪽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재밌는 점은 인문학자는 과학에 정답이 있다고 믿고 과학자들은 인문학에 다양한 관점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내 경험과 다르다.

-

내가 알고 있는 한 과학은 완전하지 않다. 과학은 패러다임이 바뀔때마다 연구분야의 유행이 바뀌었고, 프레임이 바뀔때마다 연구결과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과학은 한번도 고정된 적이 없었다. 축의 시대 이후 과학은 계속 변화했으며 지금도 계속 변화한다. 과학은 <주역> 계사전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를 가장 잘 실천하기에 오랫동안 신뢰를 얻어오다가 이제는 믿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라 변화=진보이다.

-

과학의 강점은 변화에 있다. 과학자들의 강점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은 앞선 결과를 항상 의심하며 그 결과를 어떻해든 극복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게다가 위대한 결과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환호하며 서로를 격려한다. 이런 과학적 태도가 과학 분야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싶다.

-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런 강점이 인문학에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하는 분들은 이상하게 변화를 두려워한다. 인문학이야말로 정답이 없고, 결과가 모호한 분야이기에 새로운 관점에 대한 열린 자세가 요구되는데, 대화를 꺼리고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퉁쳐버리는 경향이 높다. 왜 그럴까? 나는 늘 그게 의문이었다.

-

이젠 그 의문이 다소 풀렸다. 인문학자는 주체적 인간에 대해 말하기에 대상을 구체적으로 본다. 기존 논문에 주석을 달며 내용을 독해한다. 반면 과학자는 실체적 인간에 대해 말하기에 대상을 추상적으로 본다. 일단 기존 연구를 넘어서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로 검증한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이 고증과 주석이라면 과학은 가설과 검증이다. 그래서 과학은 해석의 여지가 넓다. 반대로 인간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석의 여지가 좁아지고 편견에 빠지기 쉽다. 인문학이 스스로를 고립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

나는 은유를 공부하면서 인문학이 편협함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시인들이 그 길의 인도자였음을 알았다. 시인들은 은유로 새로운 관점=길을 제안하고 인문학자들은 이 길을 경험함으로써 편견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인문학이 고립된 이유와 그 해결책이 무언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시의 죽음과 부활이다.


***

추신

왜이리 사람들이 추상적 상징만들기를 좋아하나 했더니 아... 추상의 유용함이 객관성에 있었구나. 반대로 구체적인 구상의 유용함은 주관성에 있고. 그러니까 구상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못하고 편견에 빠지기 쉬운 반면 추상은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기에 구체적인 실천을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사유는 추상적으로 하되, 행동은 구체적으로 해가야 하는데... 이게 쉽진 않지.

매거진의 이전글 '인의예지'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