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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Nov 18. 2019

혜강의 '기철학'을 읽으며

요즘은 혜강 최한기 관련 도올의 논문을 읽고 있다. 혜강의 기철학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인식론이고, 학문 분류로 볼때 윤리학보단 물리학에 가깝다. 즉 혜강은 철학이 아닌 과학을 탐구했다. 그러니까 그의 서술은 '기철학'이 아닌 '기과학'이라 명명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시 다산의 신고증학과 수운의 동학에 비견될 사건이다. 인문주의(유학=人)자인 다산과 수운은 모두 천주교의 신(天)관념을 도입했지만 혜강은 거꾸로 자연(物)관념을 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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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신과 자연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인간에게 미지의 대상이자 숭고의 대상이다. 그래서 과학과 신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양 근대 과학의 정초자인 뉴튼이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물론 신학의 한 분과였던 철학도 과학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경우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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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0년이 늦은 혜강은 뉴튼과 데카르트를 동시에 하려 했던듯 싶다. 뉴튼까지는 못갔고 데카르트에 그쳤다. 수운과 해월은 신학과 과학에 기반한 유학으로 새로운 정치-사회 혁명을 꿈꿨던듯 싶고. 아무튼 19세기 이들의 움직임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있었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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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석과 해석(번역)보다는 가설과 검증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다산이나 수운보다는 혜강에 좀 더 친숙한 듯 싶다. 인문학적 방법론보다 과학적 방법론을 선호한다고 할까. 그래서 인문주의자들이 보기엔 나의 비약과 도식이 상당히 불편할듯 싶다. 그러면서도 인문주의자들은 지하철을 타고 높은 건물에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현대 인공물들이 모두 가설과 검증이라는 방법론적 토대위에 만들어진 것인데. 아무튼 지금까지의 나의 사유를 볼때 난 디자인이라는 인문예술분야에 과학을 도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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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혁 샘은 내가 디자인을 예술이 아닌 사회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며 그 시각이 독특하다고 격려했다. 이를 의식하진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내 수업 내용 대부분은 자연과학 혹은 사회과학적 개념에 은유한다. 즉 난 디자인을 과학이나 사회학의 개념구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술적 가치냐 사회적 가치냐의 문제가 아닌 방법론과 인식구조의 문제다. 심지어 나는 인문적 예술까지도 과학과 사회학의 범주로 인식하고 있다. 예술과 디자인이 취향을 넘어 신뢰 있는 분야로 거듭나기 위한 사상적 전환을 꾀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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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존 디자인과 예술 서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때문에 주석도 달지 않고 해석도 하지 않는다. 믿고 따를 대상이 아닌 그냥 역사적 사건 정도로 인식한다. 나는 어떤 디자인이론가나 사상가든 잇기 보다는 극복하기를 원하는듯 싶다. 가령 독서를 할때도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보다는 "이것보단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라는 접근으로 임한다. 이는 가설적 방법론이자 인식론이다. 그리고 디자인에선 이를 '귀추법'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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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새로운 디자인 이론을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혜강처럼. 또한 새로운 사회-정치적 비전도 있어야 한다. 수운처럼. 나아가 이를 공유할 커뮤티도 있어야 한다. 해월처럼. 이 모든 것을 한 생애에 이루려는 것은 욕심이겠지. 에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2권이라도 어여 써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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