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나는 디자인을 메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인간과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인간은 인식론적으로, 디자인은 존재론적으로 접근했다. 왜냐면 현대는 '인간=뇌=신경=전기'라는 도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각은 심리학, 뇌과학, 생물학, 물리학에 대응한다. 모두 과학이다. 그리고 근대적 산물이자 과정인 디자인이 왜 굳이 이 시대에 존재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예술과 디자인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을 큰 틀에서 살펴야 했다. 너무 공부해야할 양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각 분야의 고전들은 겹치는 경향이 있다. 이 두가지 접근은 <역사는 디자인된다>에서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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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는 디자인된다>의 서문에 이성민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다. "나는 확실히 디자인에 디자인 고유의 관점과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여경이 직업적 디자이너로서 매일매일 하는 일은 주어진 데이터를 처리-디자인하여 알기 쉬운 도표로 만들어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때 그 도표는 글이나 말로 하는 설명과는 또 다른 인식 틀이다. 나는 이것을 아직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가운데 우선은 "디자인의 인식론적 역량"이라고 명명해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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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문구를 읽고 비로소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아... 나의 디자인 접근은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을 향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시기 미키 기요시의 <파스칼의 인간 연구>를 읽었다. 일찍이 <팡세>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었지만 인간의 불안과 절망이 죽음에 이른다는 점을 잘 파악하지 못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죽음'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책은 황금률 세미나에서 강독-재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입장을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회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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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인간=인식론, 매체=존재론'에서 '인간=존재론, 매체=인식론'으로 바뀌면서 나의 새로운 10년 공부가 시작된듯 싶다. 그 첫번째 독서가 시어도어 젤딘과 닐 포스트만이다. 사생활과 사적인 매체를 논하는 이들의 관점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전회를 느낀다. 과거에는 큰 틀에서 메타적으로 접근했다면, 이번에는 구체적인 사건에서 큰 틀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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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변화가 참으로 기묘하고 흥미롭다. 그래서 플라톤도 동굴을 들락날락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