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할때 어떤 느낌으로 자소들을 만들었을까? 세종에 빙의되어 상상해 보았다. 그는 한국말의 소리가 몸의 어떤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던듯 싶다. 물론 소리를 내는 입안의 어떤 느낌을 의식했을 것이다. 가령 이지원 샘이 특강때 말했듯이 ㄱ을 말할때 입안의 안쪽-위에 힘이 들어간다. 반면 ㄴ을 말할때는 입안의 바깥아래쪽에 힘이 들어간다. 즉 ㄱ, ㄴ은 입안에서 소리가 일어나는 지점을 강조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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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분석이다.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말 소리와 연관된 뜻을 기반으로 한글 자소들의 형태를 끄집어 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미 최봉영 샘이 그 틀을 마련해 놓으셔서 몇가지 자소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나의 확신을 다른 자소까지 확대 적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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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정도 고민한 끝에 한글의 자소들이 한국말(=한국인의 경험)의 의미를 어떻게 담지하고 있는지 대강 정리되었다. 이 틀을 알면 한국말을 할때 그 의미를 메타적으로 이해하며 적절하게 사용할수 있다. 무엇보다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할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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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소리와 한글 자소의 의미]
자음
ㄱ :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 (간다, 가지)
ㄴ : 위아래로 오가는 상태 (누르다, 나다, 놀다)
ㄷ :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일단 완결되었지만 계속 열린 상태 (이다, 다스림, 떨다)
ㄹ : ㄱ과 ㄴ이 모아지고 연결되어 일이 일어나 울리는 상태 (일하다, 울다)
ㅁ : ㄱ과 ㄴ이 모아지고 완결되어 닫힌 상태 (몸, 모으다)
ㅂ : 모아져서 완결된 ㅁ의 꼴이 완성된 상태 (밥, 보다)
ㅅ : 이것과 저것의 사이 (사타구니, 샅바)
ㅇ : 알과 낱개의 상태 (알알이, 낱낱이)
ㅈ : 이것과 저것이 연결된 사이 (지내다, 지르다)
ㅍ : 모아진 것이 양옆으로 왔다갔다하는 상태 (슬픔, 아픔)
ㅎ : ㅇ의 꼴이나 일이 완성된 상태 (하다, 하얗다)
ㅊ, ㅋ, ㅌ : ㅈ과 ㄱ과 ㄷ이 강조된 상태 (치다, 키다, 타다)
모음
ㅣ : 나의 중심
ㅡ : 나의 바탕
* : 나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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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에 있는 생각에 대한 지적을 읽고 최봉영 샘이 써주신 글
《팔자타령과 신세타령》
팔자타령과 신세타령은 모두 타령이라는 노래에 빗대어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팔자타령은 타고난 팔자를 아쉬워하며 늘어놓은 이야기이고, 신세타령은 살아가는 신세를 아쉬워하며 늘어놓은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느낄 때, 팔자타령이나 신세타령이라도 하게 되면, 마음에 위안이 될 수 있다.
나는 타고난 팔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팔자타령을 하지 않는 반면에 나의 신세가 이렇게 저렇게 굴러가는 것에 대해서는 이따끔 신세타령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하는 신세타령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속으로 하고, 혼자서 속으로 삼켜야 한다.
내가 신세타령을 하게 되는 것은 내가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에 관한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다보니, 맨날 앞서가는 사람들이 벌려놓은 온갖 일을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면서도, 어떤 때에는 입에서 신세타령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대중목욕탕에 가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계속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샤워기의 물을 틀어놓고서 사용하다가, 그냥 자리를 뜨게 되면, 슬그머니 다가가서 꼭지를 당겨서 물을 막는다. 나는 짧게는 3~4초, 길게는 8~9초 동안 그냥 버려지는 물이 아까워서, 그냥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러한 물을 볼 때마다 내 머리 속에서는 환경오염, 생태계파괴와 같은 온갖 생각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꼭지를 당겨서 쏟아지는 물을 막을 때,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눈치를 보아가며 아주 공손하게,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야 한다. 특히 팔뚝이나 등에 커다랗게 문신을 한 사람들이 물을 틀어놓고서 자리를 뜨는 경우에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왜 나는 남들이 벌여놓은 일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신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신세타령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은 추위를 많이 느끼는 계절에만 있는 일이고, 그것도 많아야 일주일에 한번 정도이니, 샤워기 꼭지를 막는 일 때문에 신세타령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은 언제나 늘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이 벌여놓은 일에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은 학자 노릇을 그만둘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니 신세타령을 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대한민국에서 학자라고 하는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문제들만 던져주기만 하고서, 그냥 지나가버린다. 그들은 동서양의 이곳저곳을 마구 들쑤셔서 온갖 것들을 문제로 삼아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잘 알아야 하고, 잘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온갖 것들을 문제로 삼기만 할 뿐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일과 잘 풀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또 다른 것들을 문제로 삼기 위해서 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버린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문제를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일과 잘 풀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문제를 붙들고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수 십년 동안에 걸쳐서 수많은 교육학자, 윤리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와 같은 이들이 던져주고간 갖가지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까지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뒤치다꺼리를 열심히 하고, 또한 그러한 일을 통해서 엄청난 열매를 거두어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문제를 던져주는 것으로 유세를 떠는 사람들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보람을 삼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입에서 때때로 신세타령이 흘러나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즈음에 학문하는 일에서 나의 벗이 된 윤여경이 매우 중요한 문제를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름을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면, 윤여경이 던져놓은 문제가 엉뚱한 사람이 뚱딴지 같은 일을 벌여놓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또 다른 사람이 벌여놓은 일에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니, 한번 더 신세타령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윤여경은 세종대왕이 한국말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이라는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 한국말 말소리를 음소 단위로 나누어서 분석하고 그것을 다시 음절로 묶어서 통합하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것은 훈민정음을 연구한 학자들이라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윤여경은 이러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말의 말소리가 한국말의 말뜻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ㄱ, ㄴ, ㄷ으로 말해지는 말소리가 어떤 뜻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몇 가지로 예를 들고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로 이러한 가설은 너무 많이 나갔다고 본다. 그러나 윤여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거나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국말에는 말의 소리와 말의 뜻이 서로 기대고 있는 부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을 논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서구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사람은 말을 ‘Logos’, 곧 논리라고 보았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시르, 럿셀, 촘스키와 같은 이들이 바라보는 말은 모두 논리를 뜻했다. 그런데 사람이 말을 논리로만 보게 되면, 말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말의 소리를 만드는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말의 뜻을 만드는 논리이다. 그리고 말의 소리를 만드는 논리와 말의 뜻을 만드는 논리는 서로 저마다 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에서 볼 수 있는 논리는 본래 느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빛깔, 맛깔, 냄새와 같은 느낌의 갈래를 바탕으로 느낌에 대한 알음알이가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느낌에 대한 알음알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말이라는 것을 만들어 쓰게 되었다. 말의 논리가 느낌의 갈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을 논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크게 지나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의 논리의 바탕에는 느낌의 갈래에 바탕을 두고 있는 느낌의 논리가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느낌의 갈래에 바탕을 두고 있는 느낌의 논리를 바탕으로 말의 논리, 곧 말소리의 논리와 말뜻의 논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말소리라는 것은 사람이 목소리에서 비롯하는 느낌의 갈래를 가지고 말소리의 논리를 만든 것이다. 말소리의 논리에는 목소리에서 비롯하는 느낌의 갈래가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것을 깊고 넓게 묻고 따져서 말소리의 논리를 음소의 논리로 나누고 음절의 논리로 묶어서 말소리의 논리를 세운 사람이다.
한국말을 살펴보면, 한국사람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소리의 논리를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뜻의 논리로 가져다 쓰는 경우가 있음을 또렷이 할 수 있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데, 여기서는 세 개만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국말을 살펴보면, 한국사람은 ‘아기’, ‘어버이’, ‘아직’, ‘어느’, ‘알다’, ‘얼다’, '찰랑', '철렁'과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와 ‘어’라는 말소리의 논리를 하나인 것과 여럿인 것을 가리키는 말뜻의 논리로 가져다 쓰거나, 작은 것과 큰 것을 가리키는 말뜻의 논리로서 가져다 쓰는 것을 또렷하게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오’와 ‘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로, 한국말을 살펴보면, 한국사람은 ‘날다’, ‘갈다’, ‘울다’와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ㄹ’이라는 말소리의 논리를 어떤 일이 거듭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뜻의 논리로 가져다 쓰는 것을 또렷하게 알 수 있다.
셋째로, 한국말을 살펴보면, 한국사람은 ‘답답’, ‘갑갑’, ‘섭섭’와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말소리를 거듭하는 말소리의 논리를 어떤 일이 거듭되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뜻의 논리로 가져다 쓰는 것을 또렷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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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을 서둘러서 쓴 것은 윤여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한국말에서 말소리의 논리와 말뜻의 논리가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볍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한국말에는 말소리의 논리와 말뜻의 논리가 어느 정도로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매우 또렷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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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고맙게 읽으며 필기한 도식과 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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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정리해 보았어요. 저는 ㄱ, ㄴ, ㄷ...의 의미를 나열해 놓으면, 누군가 이걸 보고 "아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정도로 만족하는 편이예요. 말씀하신대로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니까요. 각종 오류는 차차 잡으면 되죠. 제가 하는 생각들은 일종의 전위(아방가르드)가 아닐까 싶어요. 현대예술을 아방가르드라고 말하듯이요. 그런데 이 발찍한 가설에 선생님이 로마의 도로처럼 널찍하고 반듯한 길을 깔아주시니 너무 기뻐요. 듬직한 지원군이 온다는 생각에 더 과감하게 나아갈수 있거든요 ㅎㅎㅎ 아무튼 오늘도 한 후배에게 한국말의 특징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대화내내 감탄사가 연발되더라고요. 마치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들을때처럼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