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러 생각

한국말의 객관적 잣대

by 윤여경

요즘 나는 최봉영 선생님과 통화를 하면서 한국말의 바탕의미에 대해 듣는 동시에 최봉영 샘이 90년대 쓴 책을 통해 성리학의 바탕의미를 읽고 있다. 둘 모두 아주 새로운 경험이다. 최봉영 샘은 이미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 연구를 통해 한국문화를 분석하기 위한 일반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적용해 한국문화를 분석했다. 이를 조선시대에 확대해 성리학의 구조를 파악해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살펴 <한국문화의 성격>을 분석했다. 나는 요즘 이 두권을 책을 읽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理'와 '性' '情' 등등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을 풀이하고 개념의 관계들을 정리한 내용들이다. 나도 성리학에 대해 이것저것 읽었는데 이처럼 명쾌하게 질서를 나눈것은 처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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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샘은 90년대 성리학의 개념들을 집요하게 풀어내 조선사회 학문과 선비들의 문화를 분석했다. 나는 만약 이분이 조선시대 태어나 이런 책을 썼다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조선시대 연구자였던 최봉영 샘의 선생님도 이 책을 읽고나서는 제자의 말을 경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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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봉영 샘이 성리학과 조선시대를 연구한 것처럼 한국말을 연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한자기표를 놓고 그 의미(기의)를 따져물었듯이 한국말 기표를 놓고 그 의미를 따져묻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리학(남송이학 혹은 주자학)이라는 학문이 차려졌듯이 한국말로 된 하나의 학문을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밌는 점은 이 방법은 주석과 해석을 통한 경전중심의 인문학적 연역과 실험과 관찰을 통한 경험중심의 과학적 귀납이 모두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법은 연역적인데, 사유의 바탕은 귀납적이라고 할까. 아무튼 분야의 개념적 경계를 예리하게 나누던 나로서는 지금까지의 도식적 경계가 모두 무너졌다. 일반화와 환원주의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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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샘은 한국말 중 바탕을 함께 하는 낱말들을 나열한다. 예를 들면, 과거 지붕을 세울때 기대는 것을 '서(서까래)'라고 말했다. 우리는 무언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서다'라고 말한다. 바다위에 언제나 서 있는 것은 '섬'이다. 나아가 무언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3개의 나무가 필요하다. 그래서 '셋'이다. 이렇듯 '서'와 '서다' '섬' '셋'은 바탕을 함께 하는 말이다. 과연 누가 지붕과 서있는 사람, 바다의 섬, 숫자 셋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까... 나로서(<-여기도 서가 쓰인다)는 상상조차 못했다. 서와 서다, 섬과 셋의 바탕이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말들의 개념구조가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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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는 水를 '물 수'라 읽는다. 한자기표인 水는 川과 유사하다. 글자 모양이 무언가 흐르는 모습으로 보아 중국인들에게 물은 무언가 흐르는 모습으로 보였던듯 싶다. 그럼 '물'은? 물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水의 바탕의미가 '흐름'이라는 것을 알면서 정작 水의 의미를 풀이한 '물'의 바탕의미는 무언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물'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흐름=水"로서 '물'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아! 얼마나 어리석었던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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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무엇인가? 명확히 말을 못하지만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누군가는 H20라며 화학기호로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접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한국사람들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대상을 '물'이라고 말했냐는 것이다. 마치 중국사람들이 흐르는 물을 보고 '水'라고 말했듯이 우리도 중국인들처럼 '물'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야 한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물'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강처럼 흐르는 모습? 아니면 호수처럼 모여있는 모습? 웅덩이나 그릇에 고여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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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물'은 '물다'에서 나온 말이다. '물다'는 '입으로 물다' '개가 물다' 등 무언가를 무는 행위를 말한다. 물에 손을 넣으면 물은 거의 같은 압력으로 손을 문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과의 관계에서 가장 공통된 속성인 '물다'에서 '물'이란 단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물'과 '물다'는 바탕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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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물'은 무엇인가? 이 글을 읽은 사람은 바로 물에 손을 담그거나 무언가가 담겨있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물에 대한 개념구조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처럼 어떤 말과 어떤 말이 바탕을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그 단어에 대한 개념 구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 개념 구조가 바로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즉 중국말을 쓰는 사람과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 물의 이미지를 다르게 연상하듯, 말이 다르면 세상을 보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래서 옛날이든 현대든 학자들은 어원을 파악하거나 유사 개념들을 연결해 기존의 개념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을 연결해 새로운 개념구조를 세우곤 했다. 그래서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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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한국말에 익숙하다. 우리가 '理'나 '性'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그 바탕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모국어가 아니니까. 반면 한국말로 '서-서다-섬-셋' 혹은 '물-물다'는 그 바탕이 온전히 이해된다. 이런 한국말의 객관적 잣대를 통해 한국말 개념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면 한국말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적 줏대를 쉽게 갖게 된다. 아마 송명조시대의 중국인들은 주자가 마련한 성리학 잣대를 통해 자신만의 줏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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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관적 줏대를 갖길 두려워한다. 이는 중국인들처럼 중국한자를 알뜰살뜰 살핀 객관적 잣대가 한국말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말의 객관적 잣대가 없기에 끊임없이 서양이나 중국의 잣대를 빌려와 자신의 줏대로 삼곤한다. 그러나 이는 아주 허망하다. 왜냐면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세계에서 한국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늘 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라는 것이 형성된 것도 우리 스스로 한국말의 객관적 잣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과거와 현재 한국사람들의 잣대와 줏대는 제각각 뿔뿔이 흩어져 있다. 불이 타면 불불히 흩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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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찍 최봉영 샘이 아래 이미지를 보내 주셨다. 임자성에 대한 분석이다. 한국말은 이쪽과 저쪽을 어우르는 임자성을 제대로 갖춘 말이다. 그래서 한국말은 모두 함께 어울리는 사상을 품고 있다. 당연히 한국사람은 그런 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한국말의 잣대가 없어 그 바탕을 잃어버리곤 한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이젠 말의 바탕과 태도가 단절된듯 싶고, 코로나19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도 종종들려오는 훈훈한 사례들을 읽으면 여전히 그 바탕이 살아있는듯 싶다. 안타까운 점은 학교 등의 교육에서는 한국말을 배척하고 오히려 서양말이나 중국말을 가져와 한국말 개념을 살핀다. 앞서 내가 물을 흐른다고 생각했듯이. 이런 상황에서 학자들은 저들끼리 따로 어울리거나 저마다 따로 공부한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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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들의 자연철학이 성행하던 고대그리스에서 또 인도에서 또 중국에서 소크라테스와 붓다, 공자는 이 질문을 던졌다. 2500년에 던진 이 질문은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가 기원전 5세기를 주목한 이유도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말이 어떠한지 알아야 하고 나아가 한국말의 객관적 잣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토대로 한국사람들 각자가 주관적 줏대를 갖추어야 한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자존감 수업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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