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아프지만 안쓰지 않을수 없다. 아니 머리가 아프지 않기 위해 써야만 한다. 나는 수학능력시험에서 수리영역은 실수로 하나 틀렸다. 그만큼 수학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3자리수 곱하기도 못할만큼 수학에는 멍청이가 되었다. 당연히 기하학도 비슷하다. '파이'하면 원이 아니라 맛이 떠오를 정도니... 고딩때의 실력, 공대 다닐때의 수리능력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최봉영 샘과 한참을 통화했다. 통화 말미 선생님은 우리가 얘기한 것은 '문화기하학'이라고 말했다. 나는 크게 공감하며 '한국말 문화 기하학'이라고 대답했다. 오늘 통화의 첫 질문은 "한국말로 수평과 수직이 무엇이냐?"였다. 헐... 수평은 수평이고 수직은 수직아닌가... 수평은 평평한... 어물쩡 대답했다. 웃으시면서 '바다'의 '바'가 수평이라고 말하신다. 그렇게 우리 대화는 시작되었다. 마치 <논어>와 <국가>에서 공자 혹은 소크라테스가 제자와 대화를 나누듯이.
'다'는 선분이다. 그래서 '바다' 수평선이다. 그리고 '닥'은 면이라 '바닥'은 수평면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직이다. 수직은 위아래라고 말하는데 한국말로 '기'라고 말한다. 기둥, 길이, 깊이, 여기, 저기 등이 모두 수직상태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 '기'는 곧게 서 있는 상태인데 이 기가 곡선으로 '울'면 '기울기'가 된다. 곧게 선 두개의 기가 서로 울면 윗쪽에서 만나게 되는데 한국사람은 이를 '이웃'이라 말한다.
'이'는 '기'가 실체로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기가 실체로 드러날때는 무언가 일어나는데, 바로 앞단어의 '일'이 바로 '이'가 된다. '기'가 일어나서 '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좌표적 기준이다. 이를 중심으로 '온다'와 '간다'가 결정된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저'인데 '이쪽으로 오고' '저쪽으로 간다' 그럼 자연스럽게 '오'와 '가'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하게 된다.
'저'는 '지'와 관련이 있다. 무언가 바탕을 함께하는 낱말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해가 지다' '지나가다' '지내다'라는 말을 종종 쓰는데 해가 진다에서 '지'는 무언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내려가는 느낌을 준다. '지'는 한국말에서 '다'와 함께 문장 말미에 자주 쓰이는데, '그렇지' '먹지' '가고 있지' 등등 아주 자주쓰는 말이다. 이 '지'는 중력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날때 예상한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지'라고 부르는데 이에 반대되는 말이 바로 '일'이다. '하다' '일다' '뜨다' 등의 말은 모두 중력의 흐름에 역행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다. "해가 뜨면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은 일을 한다. " 모두 중력적인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물론 현대 과학에서는 해가 뜨는 것도 중력 작용이기는 하지만 수백수천년전 한국사람들이 그걸 알리 없었을 것이다.)
'울'은 중력의 자연스러움일까 의지의 작용일까.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기'가 '울'어 곧은 것들이 서로에게 기울면서 자연스럽게 윗부분에서 만난다. 그래서 기가 실체화되어 드러나 만난 것을 앞서 '이웃'이라 말했다. 기(이)가 두개가 만나서 이웃이 되면 서로 기댈수는 있어도 설수는 없다. 제대로 서려면 세개의 기(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설 수 있다. 기운 기의 숫자가 들어날수록 더 안정되게 설 수 있다. 무한대의 기가 있으면 완벽하게 설 수 있다. 마치 원뿔처럼. 이렇게 완벽하게 선 닫힌 울타리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울=우리'가 된다.
혼자는 설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울'은 아무래도 의지의 작용인듯 싶다. 둘은 기댈 수 있지만 서진 못한다. 셋이 되면 비로소 서는데 불안하다. 넷, 다섯, 열, 백, 천, 만... 계속 늘어날 수록 완벽하게 서게 된다. 그래서 셋은 의미가 있다. 최초로 설 수 있는 숫자니까. 서양사상에서도 셋은 중요하다. 피타고라스는 피라미드를 보고 삼각형을 숭배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철학자들이 삼위일체와 삼각형을 숭배했다. 데카르트는 신존재증명을 정삼각형의 존재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런 흐름은 현대 생명과학에도 이어진다. 구글에 코흐의 법칙을 검색해보라.
서양사람에게 삼각형은 최초의 닫힌 상태다. 한국사람에게 삼각형은 최초의 선 상태다. '닫힌 상태'와 '선 상태' 이 둘은 공동체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건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삼각형에는 세개의 모서리가 있다. 모서리에서 바깥은 '모'이고 안쪽은 '어'이다. 우리가 주먹을 앞으로 내는 것을 '지르다'라고 말하듯이 '모질다' '어질다'는 '모+지르다' '어+지르다'이다. 모진 사람은 뾰족한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생각만 해도 아프다. 어진 사람은 넒은 쪽으로 아우르고 어울려 나아가는 사람이다. 생각만 해도 따뜻하다. 우리는 흔히 '못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때 '못'은 모서리의 바깥이다. 공동체는 모서리 안쪽에 있다. 어 방향이다. 어 방향의 삼각형 안쪽이 바로 울=우리이다. 그러니까 '못'한다는 울=우리=공동체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사람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의미다.
한국사람은 '수평=바'와 '수직=기'만이 아니라 안과 밖도 사유한다. 이때 안에서 밖은 위아래와 연동되어 있다. 기들이 아주 많으면 기울기가 적어진다. 울이 커질수록 기들이 모여있는 울의 높이도 높아진다. 그렇게 울=우리는 커간다. 즉 큰 우리들에게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봉영 샘은 오늘 아침 인간의 도덕성 발달에 대한 도식을 보내주셨다. '저만 - 저들끼기 - 남들까지 - 것들까지'로 이어지는 4단계 도덕성 이론이다. 이 도식은 현재 사회심리학 최신판에 인용될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인데, 이 도식과 기울기 공동체 사상이 연결되어 있다. 선생님은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의 공동체 사상을 '쪽사상' 혹은 '함께사상' 혹은 '우리주의'라고 말하는데 이는 도덕성 발달이 4단계 것들까지 다 이우러져 모든 우주가 함께하는 하나의 쪽이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의 '우리' 밖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최근 한국사람들은 저만 혹은 저들끼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우리밖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싸우기만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은 외국에서 이들을 화해시킬 사상이나 이론, 방법들을 찾는다. 한국말에는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사상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말해줘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엄마말은 다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춘기다. 나는 우리 사회가 사춘기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외국말로 된 어려운 외국사상이 아니라 한국말로 된 쉬운 한국사상이 절실하다고 본다. 나도 10여년 이것저것 외국것을 살폈지만 지난 3개월동안 최봉영 샘에게 배운 것에 비하면 참으로 어이 없으니까.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나는 여전히 수학적 기하학은 못하지만 위에 나열한 '바'와 '기'를 기반으로 '이' '저' '하' '일' '뜨' '모' '어' '울'을 알게 되면서 기하학을 넘어 인문학을 아우르게 된다. 나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기울어 몇자 끄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