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기'와 '울=우리'에 대한 글을 쓰고 최봉영 샘과 한번 더 통화하고, 몇개의 기사를 읽으면서 '개종'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도 개종이런 표현을 종종 사용하시는데, 나는 이 말을 들을때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항상 떠오른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회심'이라 표현하는데 철학에서 이를 메타노이아라고 말한다.
나는 많은 신천지 교도들이 회심(메타노이아)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회심은 전통 기독교 입장에서 볼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역행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신천지를 이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이런 취급이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행한 여러 결과를 놓고 볼때 신천지가 그렇게 취급받는 것은 크게 부당하지 않다. 실제 내 주변의 여러분들이 그 피해를 입었다.
놀라운 점은 최근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에서 신천지로 회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말 놀랍고 슬픈 일인데 우리 사회의 지성들이 이 현상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이 사회가 무엇을 못했고, 신천지가 무엇을 잘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젊은이들의 회심을 메타적으로 살피지 못하면 똑같은 문제를 계속 반복될 것이며, 언젠가 교회와 이단의 관계가 전복될지도 모른다. 생각만해도 슬픈 일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개종을 생각해본다. 개종이란 종교를 바꾸는 것인데, 과연 신천지 교도들은 개종한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한 것일까? 생각을 바꾸는 것은 개종일까? 개종은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신천지의 이름은 '신천지 예수교'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을 기독교의 한 종파로 본다. 물론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이런 점에서 신천지 교도들의 회심은 개종까지는 아니다. 개종은 유교에서 기독교로 바뀐 경우에 해당되니까. 어쩌면 당시 아우구스티누스가 믿던 초기마니교도 초기기독교와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어짜피 당시 둘 모두 조로아스터교에 뿌리를 함께 두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개종이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회심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회심은 개종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고 새로운 생각과 타협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회심이란 반환점을 돌아 생각을 반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몸을 기울리는 것에 가깝다. 곧게 가다가 곁에 있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려 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회심이 아닐까... 물론 그 기울림의 방향이 크게 바뀌어 지금까지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면 개종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개종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말하는 개종은 사실 개종이라기 보다는 '회심=기울기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 선생님과 자주 나누는 대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데... 앞선 이유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점점 더 회의감이 든다. 개종은 커녕 회심조차 힘들다면 신천지는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그들의 포교 전략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다. 나는 이 정체숨김이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정체를 숨기는 것은 '떳떳하지 못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정체를 밝히는 것은 정직함이 아니라 '공감하지 못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공감하고 다가가는 사람은 대부분 듣는다. 그렇게 상대의 환심을 산다. 이때 환심은 일종의 환대다. 듣는 행위로 환대를 함으로서 상대방의 환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정체를 드러내서가 아닐까. 정체를 드러내고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넌 우리편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상황에서 무슨 공감이며 무슨 환대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지점에서 최봉영 샘의 책 한구절을 인용해본다.
"서양인과 한국인은 남의 말을 듣는 태도가 조금 다르다. 서양인은 개인주의라는 바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더라도, 그것을 받아주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서양인은 남의 말을 아무리 귀담아 들어주더라도, 그의 뜻을 알아주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귀담아 들어주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인은 우리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면, 그것을 우리의 일로서 받아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언제나 거리를 두는 척하면서 들음으로써, 남의 뜻을 알아주는 것에 대한 나의 부담을 줄이려고 한다. 내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게 되면, 남이 내가 그것을 들어줄 수 있을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쉽다. 이어령 선생이 한국인은 히어만 하고 리슨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인의 속내를 깊이 살피지 않은 데서 나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최봉영, 185p
나는 이 대목에서 무언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한국사람에게 대화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한국사람의 듣는 특성상 먼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사람의 온전한 쪽이 되어주고, 그 다음 나의 이야기를 해서 상대방도 나의 쪽이 되도록 하는 대화법. 이것은 일종의 대화균형이다. 어쩌면 이를 가장 잘 실천한 이들이 신천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실천하지 못한 이들이 우리 자신일 것이다.
요즘 나는 최봉영 샘의 콘텐츠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 콘텐츠를 알게 되면 생각의 회심=기울기가 시작된다. 몇몇분들을 통해 검증된 바 있고 간증하는 사람도 있기에 나는 이를 '최봉영 효과'라 말한다. 선생님은 최봉영 효과를 위해 먼저 최봉영의 정체를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나는 정체가 드러나면 사람들이 힘들어 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천지 전략의 유효함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신천지 '전략'을 우려한다. 왜냐면 '전략'이란 단어는 전쟁의 개념구조를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간간히 보이는 신천지의 모습은 마치 나치처럼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나는 정체를 숨기는 '전략'이 아니라 정체를 먼저 말하지 않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어떤 방법이 좋을까. 모두가 함께 어울리며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 수직이 아닌 수평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 방법을 잘 디자인해야 할텐데... 만약 이 방법디자인에 성공한다면 신천지 전략에 잘 대응-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사회를 외면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릴 수도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