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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러 생각

물리학으로 본 인문학, 그리고 대화

by 윤여경

난 종종 물리법칙을 통해 인문학, 사람과 사회, 삶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파동이 아니기에 양자역학 이전의 고전물리학 공식을 놓고 따져보았다. '사람=입자'라고 여기고 힘(F)와 에너지(E) 그리고 질량과 가속도(a), 빛의 속도(c)를 상관관계를 따져 우리 삶에 있어 순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아래의 글들은 당시 생각의 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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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법칙을 사유할때 나는 질량(m)을 상수로 놓고 주로 힘과 속도의 관계를 따졌다. 힘은 속도에 비례한다.(정확히 말하면 가속도(a)에 비례한다.) 그러니까 같은 질량을 가진 자가 힘을 가지려면 속도를 높여야 한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변화가 빠르기때문에 이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속도에 적응해야 한다. 누가 빨리 적응하고 대응하냐에 따라 힘, 즉 권력 관계가 달라진다.


어제밤 최봉영 샘과 늦게까지 물리법칙에 대해 통화했다. 나는 주로 듣는 편인데,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선생님은 가속도가 아닌 질량에 대해 오랜동안 생각해 오셨다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속도는 상수였다. 나는 뉴튼의 법칙을 놓고 생각했기에 변화무쌍한 가속도가 눈에 확들어왔다면, 선생님은 주로 아인슈타인의 법칙을 놓고 생각을 이어가셨기 때문에 속도에서 다소 자유로우셨다는 생각이다. 어짜피 빛의 속도는 정해져 있으니까.


무엇보다 선생님의 질량에 대한 가설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질량을 단순히 무게가 아닌 체적과 표면적의 상관관계로 보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쇠구슬을 생각해보자. 쇠구슬이 커질수록 체적대비 표면적이 작아진다. 아무래도 내부의 공간이 많아지니까 당연한 현상이다. 반면 쇠구슬이 작아질수록 내부의 공간이 적으니 체적대비 표면적이 커진다. 표면적은 어떤 대상이 외부의 대상과 관계하는 창구이다. 자신의 체적보다 표면적이 크면 외부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반면 자신의 체적보다 표면적이 작으면 내부에 가진 것이 많아서 외부의 영향을 덜 받는다.


눈앞에 큰 쇠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공을 밀려면 아무래도 힘이 많이 들어간다. 반면 아주 작은 쇠구슬이 있다고 생각해보다. 가볍게 들어서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크기가 작은 것들은 아무래도 외부 자극에 의해 움직이기 쉽기에 운동량도 많을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몸짓의 체조선수와 듬직한 스모선수를 상상해도 좋다.


이와 관련해 선생님은 척력(미는 힘)과 인력(당기는 힘)에 대해 오랜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리학은 주로 당기는 힘을 놓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서로 미는 힘을 함께 놓고 생각하셨다. 이때 나는 양자역학의 4가지 힘, 강력-약력-전자기력-중력이 떠올라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해, 양자역학을 잊고... 질량과 힘의 관계만 따져보면서 선생님의 생각을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질량이 큰 쇠공은 아무래도 체적대비 표면적이 작기 때문에 내부의 힘이 축적되어 있다. 외부의 자극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당기는 힘(인력)이 세다. 반면 질량이 작은 쇠구슬은 체적대비 표면적이 크기 때문에 내부의 축적된 힘이 작아서 외부의 자극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움직임이 활발해 미는 힘(척력)이 세다. 그래서 변화는 큰 쇠공이 아닌 작은 쇠구슬 같은 존재에서 많이 일어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변화를 원할때 중심에 있는 큰 것의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실제 변화는 외부에 있는 작은 것들에서 일어난다. 사실 '변화의 요구'가 있어야 변화가 시작되는데, 이 요구는 기득권과 같은 내부의 큰 권력이 아니라 외부의 작은 저항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민중들의 반란이 그랬듯이.


최봉영 샘의 물리학 이야기는 이런 의도를 갖고 있는듯 싶다.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길 원했다. 아무래도 디자이너라 그런지... 체적과 표면적의 관계에 있어 '소통'을 따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디자이너라서만이 아니라 요즘 신천지 덕분에 젊은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좋은지, 한국사람에게 적합한 대화 방식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의 방법'은 나의 오랜 고민이기도 하다. 왜냐면 한국사회의 문제는 모두 대화가 아닌 전쟁의 방법으로 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사람들이 갈등이 생겼을때 대부분 전쟁은유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전략' '승리' '전멸' 등등의 단어는 모두 전쟁을 암시한다. 나는 이런 사회에 가장 절박한 것이 대화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대화에 대한 한 이야기를 소개하면 인디언 아이들이 미국의 교실에 처음 들어갔을때 마침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시험을 보려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인디언 아이들은 둥글게 모여 앉았다. 선생님은 놀라며 "얘들아 왜 그렇게 앉았어?"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희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둥글게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배웠어요!"라고 말했다.


위 이야기는 초원의 습관이다. 초원의 수장들은 서로 둥글게 앉아서 회의한다. 수장들을 대표하는 대장을 뽑아도 그렇게 한다. 대장은 중심에 앉지 않고 둥근 원의 한쪽에 앉는다. 최봉영 샘은 '화백'을 말씀하셨다. 나도 가끔 가장 좋은 대화법으로 화백을 생각하곤 한다. 화백의 화和는 '조화로움'을 말하고 백白은 '말'을 의미한다. 즉 화백은 조화로운 말인데... 이는 여러사람이 고루고루 말한다는 것이다. 인디언 아이들, 초원의 수장들처럼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존중한다는 의미다.


둥근 원을 표면적으로 보자. 여러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는 것은 표면적을 키운다는 것이다. 표면적을 키운다는 말은 여러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사람이 둥글게 모여앉을수록 가운데 체적도 커진다. 표면적대비 체적이 커지면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 어려워진다. 쇠공처럼 무거워 움직이기 어렵다. 반면 사람이 너무 적으면 쇠구슬처럼 기민하게 움직일수는 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린다. 그래서 둥글게 앉는 화백 숫자는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따라 나온다. 가장 적절한 대화의 관계는 몇명일까?


나는 이스라엘의 하브루타를 떠올려 2명을 생각했다. 2명이 대화하면 평등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화의 균형이 잡힌다. 인원이 늘어날수록 대화의 평등성이 사라지고 누군가가 더 많이 말하기 마련이다. 그럼 대화의 관계가 깨진다. 그런데 2명의 대화로는 무언가를 세우기 어렵다. 일을 하려면 반드시 3명이상이 모여야 한다. 어제 한국말 기하학에서 언급했듯이. 그렇다면 3~4명이 가장 적합한 크기의 대화그룹일까? 아니면 더 커져야 할까... 이 시대 최고 뇌과학자인 마이클 가자니가는 침팬지와 인간의 대화를 언급하면서 침팬지는 2명의 대화를 즐기고, 인간은 4명의 대화를 즐긴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렇듯 2명은 원초적이고, 4명은 문화적이다.


이젠 힘에 대해 생각해보자. 큰 것은 당기는 힘이 강하고, 작은 것은 미는 힘이 강하다. 그렇다면 큰 대화 그룹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것이다. 또한 슬쩍 대화에 참여해도 별로 티가 안난다. 반면 작은 대화그룹은 새로운 대화 상대를 추가하는데 신중할 것이다. 그만큼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니까. 콘텐츠도 그렇다. 강력하고 큰 콘텐츠는 상대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반면 빈약한 콘텐츠는 상대를 밀어낸다.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은 그 콘텐츠에 흠뻑 빠져 종속되지만, 덜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은 그 콘텐츠를 놓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도 있다.


이런 상상을 통해 우린 학교와 공부 그리고 수업과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면 좋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너무 장황하게 설명한 감이 없진 않지만, 아무 기준도 없이 맹목적으로 수업을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장황한 시행착오를 낳는다. 요즘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이 큰 논란이다. 누군가에겐 큰 고통일 수 있겠지만... 선생님들이 수업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던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 논란과 고민이 반갑기만하다. 이를 계기로 온오프를 넘어 학교와 수업이 어떠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사유가 더욱 절실한 시기라 본다.


물리학의 단순한 법칙은 힘과 질량(체적과 표면적) 그리고 속도(가속도와 빛의 속도)에 대한 양적 계산을 추구하지만, 이를 인문학으로 가져오면 힘과 질량, 속도의 질적 계산을 하게 된다. 대화(수업)의 그룹 크기와 내용, 대화 시간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가능성(가치)은 우리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물리학은 물리학으로, 인문학은 인문학으로 그쳐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세기말 빈의 정신과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광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 광장의 '광'은 '넓은 공간'이 아니라 '넓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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