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인터뷰를 마치고 출판사 대표님이 맛난 저녁을 사주셨다. 대화도중 <반일종족주의>로 유명한 이영훈 교수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의 책 <한국경제사>와 그가 만든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 저자의 책을 몇권 읽었다. 이들의 책을 읽으며 이 사람들은 한국의 아날학파라고 생각했다.
아날학파는 20세기 중반즈음 결성된 프랑스 역사학파다. 이들은 정치와 이념 중심의 역사가 아닌 경제와 사회 중심의 역사를 강조한다. 정치 중심으로 역사를 다루면 아무래도 편향되기 마련이니까. 프랑스 아날학파로 유명한 사람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쓴 페르낭 브로델이다. 이 사람의 대표 저작은 <지중해의 기억>인데 아날학파는 자주 변동하는 정치세력이 아닌 거의 변하지 않는 환경적 특성을 강조한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장기지속'이라고 말한다. <지중해의 기억>도 지중해의 기후와 지리적 특수성을 통해 지중해 주변의 역사를 살핀다.
아날학파를 만든 사람은 마르크 블로크다. 이번에 인터뷰를 한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의 제목이 만들어진 이유는 내가 책 도입을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라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첫문장을 한참 고민했는데, 문득 마르크 블로크가 쓴 <역사를 위한 변명>의 첫문장이 떠올랐다.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제게 설명해 주세요” 그런데 이를 그대로 쓸 수 없어 요약한 것이다. 즉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는 <역사를 위한 변명>의 오마주다.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위한 변명>을 마치지 못했다. 당시는 2차대전중이었는데 블로크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총을 든 역사학자' 상상이 되는가? 아무튼 그는 안타깝게도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역사에서 정치색을 배제한 블로크는 내가 아는한 가장 정치적인 역사학자다. 총 맞아 죽은 역사학자는 아주 드물다. 낙성대연구소의 이영훈 교수도 가장 비정치적인 역사를 강조했지만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한다. 물론 누구나 시대의 자식이기에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정치를 배제한 이들이 가장 정치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