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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ug 27. 2017

인공지능과 인간

어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인공지능은 분명 인간의 삶과 태도를 엄청나게 바꿀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래서 나는 인간에 대한 사유는 '인지'를 다루는 '인식론'에서 '죽음'을 다루는 '존재론'으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즉 쾌락의 인간, 윤리적 삶에 집중하는 철학이 아닌, 영성의 인간, 죽음 이후를 사유하는 종교가 다시 복귀할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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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그리스 말기, 로마 말기, 중세 말기에 관심을 두는데, 우리 시대는 미국, 정확히 말하면 북유럽의 문명이 어떤 한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 마케도니아에, 로마도 게르만에, 중세도 바이킹에게 문명이 접수되면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가 갑자기 끝이 났다. 모두 북쪽에서 불러온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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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래의 영상에 상당히 동감하지만, '데이터교'란 말은 마뜩치 않다. 왜냐면 '데이터교'는 삶에 유용한 것이지 '죽음'에 유용해 보이진 않는다. 그렇기에 '교'라는 말이 좀 어색하다. 물론 과학에 영생을 의지하는 태도들도 상당하지만, 이 태도는 진시황의 희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능할 것 같지만 결국 불가능했던 희망이었다. 파스칼이 '내기'라는 은유로 신을 사유했듯이, 차라리 착하게 살아서 죽음 이후에도 새로운 삶을 얻겠다는 태도가 더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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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식론은 인공지능으로 넘어갔다.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이 뇌와 감각의 메카니즘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다. 우리는 어떻해든 이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불안과 권태로움이 뒤섞이 묘한 감정 상태로. 그래서 오락과 재미, 즐거움에 매달린다. 쾌락적 인간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강건한 태도로.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자신을 죽이며, 권태를 극복한다. 마치 냉동고에 갇힌 인간처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지 않다. 천억개의 뉴런이 100조 이상 연결된 상태를 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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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사회, 과학, 철학, 역사 등 참 다양한 분야를 두루 공부한다. 저마다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나름 솔루션도 제공한다. 다들 그럴싸하지만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다. 이론이 틀린 것인지, 현실이 이론을 외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읽는 나 또한 그냥 다양한 관점을 얻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긴 과거의 해법이 지금도 먹힐 것이란 생각은 그저 도박일 뿐이다. 결국 패러다임과 프레임의 문제 아닌가... 파스칼이 제안했던 그 내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그보다 못하다. 최소한 파스칼은 내기를 통해 순수이성이 아닌 실천이성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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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들도 딱히 데이터교와 멀지 않다. 문제는 모두 '죽음'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일부를 위해, 많은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기조차 한다. 한국,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이념과 진보, 괜찮은 삶이란 이유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쌓아왔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죽은 전쟁, 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도, 대량생산을 넘어 대량살상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신통방통하다. 모두가 느끼지 못하는 인공지능이라도 된 마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인간의 꿈이 비효율, 불합리 있다는 점을 망각한채. 물론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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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죽음'이다. 어제 이우녕 선생은 '신앙과 종교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계속 곱씹는다. "그래 종교는 분쟁이지만, 신앙은 분쟁이 될 수 없지..." 종교는 역사의 냄새가 많이 난다. 어쩌면 현대의 종교 또한 데이터교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 다수결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듯이 공리주의에선 자본이나 종교나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신앙'은 다르다. 다수결로 해결할 수도, 합리적으로 말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법칙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신성한 영역이다. 죽음을 아는 인간, 죽음의 필연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의 존재론적 사유가 시작된다는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문을 열고 그 안을 들어다 보아야 한다. 죽음의 거울에 비추어 우리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최소한 모 대기업 회장처럼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죽어도 죽지 못하는 불합리한 인생을 살지 않지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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