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162151055&code=960100&s_code=am025
[신유물론]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 마지막회다. 나는 이 칼럼 그래픽을 전담했는데 아주 힘들었다. 내용을 읽고 소화해서 그래픽으로 구현하는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이었기에 숙고할 틈이 별로 없었다. 마치고 나니 보람있다. 고생한만큼이나.
지난주와 마지막 칼럼은 주제는 내게 익숙한 주제였다. 지난주는 환경, 인문, 인류가 주제였고, 이번에는 유물론, 일원론, 공진화이다. 칼럼에서는 위 주요개념들을 '물질'이란 단어로 묶는다. 나는 과거에 이 개념들을 '그린'이란 단어로 묶었고, 최근에는 '몸'이란 단어로 여기고 있다. 몸은 '모으다' '모여있다'와 바탕을 함께하는 말이다. 그래서 몸은 단순히 인간 몸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모여서 함께하는 모든 것'인 우주를 의미한다.
아래 칼럼은 서양고전을 기반으로 과학과 철학, 최신의 사회학을 넘나든다. 이름도 생소한 학자들과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알쏭달쏭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한다. 그래서 인문학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내용이 쏙쏙 들어오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읽어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특히 유물론이나 이원론은 익숙한 용어지만 전혀 이해되지 못하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사람들은 유물론이라 쓰면서 감각되는 온갖 것들을 '유물'이라 말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유물론은 그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사람이 생산한 인공물만을 '유물'이라 말한다. 나무나 돌 등의 자연물은 물질이지만 '유물론'에서 빠져있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을 학대하고 파괴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마치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학대해 부를 축적했듯이.
이원론은 쉽게말해 우리 몸이 정신과 신체로 나누어져 있다는 의미다. 주로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기에 정신이 강자고 신체가 약자다. 원으로 말하면 가운데 중심점이 정신이고 중심을 둘러싼 주변이 신체다. 정신은 동물처럼 신체를 잡아먹지는 않는다. 왜냐면 신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으니까.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학대하는 정도로 그친다. 때론 신체가 원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주로 술마셨을때나 절대권력을 차지했을때 그렇게 된다. 그래서 아렌트는 "정신이 없는 놈=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악마라 말했다. 사람들은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말한다.
일원론은 신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는 점을 파고 들어, 정신과 신체는 본래 하나라는 입장이다. 당연한 말이다. 나아가 신체가 관계하는 대상들, 사물(사건과 물건)도 모두 하나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정신과 신체와 사물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이를 과학에서는 진화론을 가져와 '공진화=모두 함께 진화"라 말한다. 공존, 공생설이 다 이런 말이다. 이 칼럼에서 말하는 '신유물론'도 그런 입장이다. 요즘 이슈로 떠오른 환경문제와 코로나19 등도 다 이런 입장에서 설명 가능하다. 코로나19에 정신승리 따윈 없다. 현대 사회에서 아큐는 살아남기 어렵다.
[문법]
요즘 최봉영 샘과 통화하는 내용은 주로 문법이다. 주어, 동사, 목적어란 무엇인가?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해서 말씀해주시는데 너무 놀라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웃음'에서 '웃'은 '위'에 있다는 느낌이다. 어른이 귀여운 어린이를 보면 웃음이 나는 느낌이랄까.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앞선 쓴 유물론, 일원론, 공진화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아 이걸 알면 저런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고 새로울 것도 없는데..."
영어에서 주어는 'subject'이다. subject는 주제, 신하, 국민이란 뜻이 있다. 영어에서 subject=국민은 지배당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sub가 아래이고 ject가 뭔가를 쏜다이기에 subject는 아래로 뭔가를 쏘는 느낌이다. 이상한 점은 문법에서 이 subject를 '주어'라 번역한다. 더 이상한 점은 철학에서 이 subject를 '주체'라 번역한다. 아니 피지배 국민이 어떻게 주어가 되고 주체가 된단 말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최봉영 샘은 subject가 '주어'로 번역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란 점을 최근에 깨달으셨다. 몇번이고 한탄을 하며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을 원망하셨다. 이 번역은 일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근본적인 잘못은 일본학자들이다.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쓴 한국학자들이 잘못한 점은 별 생각을 안한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영어 문법에서 문장 맨 앞에 있는 것을 subject라 부르니까 이것이 문장(語)의 주인(主)라고 여긴듯 싶다. 물론 subject는 문장의 주인이 맞다. 하지만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 바로 말하는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이 subject(주제)를 선정하고 이 주제에 맞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렇기에 영어에서 subject는 말하는 사람의 신하이다. 그런데 '주어'라 번역해 놓으니 문장에서 문장을 말하거나 쓰는 사람은 사라지고 문장내의 주인만 남은 꼴이 되었다. 게다가 철학에서 이를 주체라 말하니 더욱 그런 상태가 고착되어 버렸다.
subject는 일종의 기준이다. 말하는 사람이 일단 어떤 기준을 세우고 뒤에 말들을 이어간다. 영어에서 subject 뒤에 나오는 말은 verb이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동사(動詞)로 번역했고, 한국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물론 이 번역도 적절치 않다. Be동사에서 알 수 있듯 영어에서 verb는 움직이지 않는 것도 많다. verb 다음에 나오는 말은 주로 object이다. 당연히 object=목적어 번역도 이상하다. 영어에서 object는 사물, 관심대상, 저항을 의미하는데 이들 모두를 '목적어'란 단어의 의미에 담기 어렵다.
말은 '주어+동사+목적어'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나라 말이든 비슷하다. 한국말은 '주어+목적어+동사'로 어순이 다른 뿐이다. 문제는 주어는 주어가 아니고, 동사는 동사가 아니며, 목적어는 목적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문법 단어들은 모두 오역이다.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오해해 시달렸다. 주어가 주인이고, 동사는 움직여야만 하고, 목적어는 무조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과 문장이 어색해지고, 생각이 꼬였다.
주어는 주인이 아니라 기준이다. 동사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태이다. 목적어는 목적이 아니라 주어가 대상으로 삼는 사물이다. subject, verb, object 영어는 이를 올바른 용어로 말하고 있다. 그걸 일본과 한국 사람들은 이상한 용어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상한 개인, 자유, 주체가 말해지고 무조건 사물과 대상을 목적화시켜버리는 태도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함께성]
들뢰즈, 푸코 등 신물질론의 토대를 놓은 90년대의 사상가들은 무언가 잘못되어만 가는 사회를 '중심의 고집'이라 진단하고 탈중심성을 강조했다. 디자인에서는 이를 '해체'라 말한다. 물론 이 해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디자이너는 흔치 않다. 그냥 다 분해하는게 해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분해도 해체가 맞긴 하지만.
우리는 '주어'라고 '목적어'라고 말하면서 중심과 주변을 상상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주어=중심, 목적어=주변이란 도식이 형성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어=주체'의 자리에 있어 '목적어=객체'를 부려먹고 싶어한다. 모두 subject를 주어로 잘못 번역했기에 나온 관념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subject는 주어가 아니라 주제이다. 말하는 사람이 선택한 주제이다.
말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주제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사과는 맛있다"는 가능하지만 "사람이 맛있다"는 인육을 생각나게 하기에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문장이 복잡해지면 주제는 더욱 구속받는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었다"는 자연스럽지만, "나는 책을 먹으면서 음악을 맛있다"라는 문장은 어색이다. 이렇듯 말하는 사람은 subject=주제를 맘껏 고를 수 있지만 그 뒤에 나오는 verb와 object는 주제에 맞게 따라 나와야 한다. 이게 바로 논리다. 선생님은 이것을 로고스(logos)라 말하셨다. 이제야 logos가 이해가 된다고 탄식하면서.
영어문장에는 능동과 수동이 있다. 주로 subject가 object에 능동적이다. 가끔은 object가 subject에 저항하는데 일본학자들은 이를 수동(受動)이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도 이상하다. object의 저항정신을 반영하지 못했으니까. 능동과 수동이라는 일방적인 구분은 말의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아무튼 말하는 사람이 선정한 subject는 맘대로 무언가를 할 수(verb) 없다. 늘 object를 염두해야 한다. 그래서 subject와 object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속박된 상호적인 관계다. verb는 그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다.
한국말의 순서는 subject 뒤에 바로 object가 나오고 맨 마지막에 verb가 나온다. 관계하는 대상들이 나열되다가 그들이 모두 함께 어떤 일을 버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서양이나 중국말처럼 능동과 수동이 두드러지지 않고 모호하다. subject의 일방성, object의 저항성이 훨씬 덜하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우리' '함께'라는 말을 자주하는 듯 싶다.
독일말, 라틴말, 그리스말에는 산과 바다 등의 자연물에도 성(性)이 구분된다. 우리는 '성'하면 남자와 여자부터 떠올리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던듯 싶다. 산과 바다에 여자와 남자가 있을리 없으니까. 선생님은 그들에게 성은 남성, 여성이 아니라 능동과 수동이지 않았을까 여기신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능동=남자, 수동=여자라는 도식을 강조했고, 19세기 이후 이 도식이 해체되는 것이 최근의 페미니즘 흐름이다. 그렇다면 '근대성=능동성=남성성'은 당연히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능동적인 사람만이 근대인이기에 능동적이어야만 한다는 편견, 남녀의 구분을 넘어 능동과 수동의 도식 자체를 부정하는 페미니즘, 나는 이를 5G(5세대) 페미니즘이라 명명하고 싶다. 5G 페미니즘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애초에 젠더는 여자남자의 문제가 아니었어, 능동과 수동이라는 구분과 태도가 문제야!"
한국말이 그렇듯, 본래 서양말도 이쪽과 저쪽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쪽은 subject이고 저쪽은 object이다. 그리고 verb는 함께 함이다. 이쪽과 저쪽이 어울려 함께 해야만 올바른 문장(logos)이 된다. 올바른 문장을 쓰지 못하면 소통하지 못한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야? 똑바로 말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나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문법에 속아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 싶다. 말하는 사람이 주어에 휘둘리고, 목적어를 억압하고, 동사를 움직어야만 한다는 착각을 했기에 말과 삶의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것을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앞서 들뢰즈와 푸코가 말한 탈중심은 주어=subject와 목적어=object를 말한다고 여긴듯 싶다. 하지만 선생님과 나의 생각에 이들이 말한 중심은 '주제'가 아닐 '말하는 사람'이란 생각이다. 말하는 사람이 해체되는 것이 해체이고 탈중심이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은 늘 그대로 둔채 주제와 대상만을 해체해 왔다. 주제와 대상은 로고스로 연결된 존재이기에 해체해서는 안되고 해체 될 수도 없는데... 그걸 해체해 놓고 해체라 말하고 있었다니... 진짜 해체의 대상은 주제와 대상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이다. 그걸 해체해야 새로운 세상을 맞이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봉영 샘은 주어와 동사, 목적어를 대체할 한국말을 만드셨기에 이를 소개한다. 주어는 '곧이말', 동사는 '지님말', 목적어는 '맞이말'이다. 다소 어색한 표현이지만 자꾸 말하면 훨씬 적합한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