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학교 학생들이 모여 고전소설을 읽는다. 주로 실존주의 소설을 읽길래... 나도 한때 실존주의에 관심있던적이 있던터라 예전에 실존주의를 정리한 포스팅을 찾아보았다. 과거 실존주의에 관심을 두었을때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비교하며 생각했다. 그때 내린 결론은 믿음의 문제였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신본, 인본, 실존이 갈라진다. 신본주의자들은 신을 믿는다. "신이여!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시나이까"라며. 인본주의자들은 지혜를 믿는다. "아 그때 그렇게 하지 말껄". 실존주의자들은 우연을 믿는다. "기왕 이렇게 된거 닥치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
이 믿음의 가장 큰 차이는 인과관계 문제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자들은 나름대로 세상은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 신본주의자들은 나는 모르지만 신만이 아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고, 인본주의자들은 나는 어리석어서 세상의 인과관계를 놓쳤다고 본다. 그래서 경전을 열심히 읽고, 자연과 사회의 인과관계를 살핀다. 반면 실존주의자들은 필연적인 인과관계 자체를 믿지 않는다. 모든건 우연일뿐이니까.
인과관계는 여러 표현이 있다. 서양에서는 논리, 인도에서는 연기, 중국에서는 인과, 한국에서는 바람에... 인류의 지성들은 모두 인과관계를 믿었던듯 싶다. 심지어 인과관계를 부정한 흄마져도. 그런데 사는게 너무 고단하면 일일히 인과관계를 따질 여유가 없다. 그래서 실존주의자가 되곤한다. "에잇 모르겠다. 퉤퉤. 죽던지 뒈지던지 닥치는대로 살자!"라는 태도가 싹튼다.
실존주의를 허무주의 혹은 회의주의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실존과 허무는 다르다. 일단 허무주의자들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허무하다는 생각조차 안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세상의 인과관계를 부정하지만 '인과관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뭔가 다른 인과관계를 찾을 뿐이다.
요즘은 확실히 실존주의 시대인듯 싶다. 먼미래를 살피기 보다는 당장의 내일, 내년, 2년뒤, 4년뒤를 더 궁금해 한다. 한국사람 중에 2050년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교육은 백년의 계획이라는데 과연 누가 터무니없이 긴 백년을 바라보며 교육을 할까. 서로 대화하거나 공감하기 보다는, 가르치고 누르려만한다. 내 옆의 누군가가 실수하길 노리고 있다가 틈이 보이면 이를 기회로 삼아 이기려고만 하는 세상이다.
근대 사상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코기토 에르고 숨" 번역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내 식대로 번역하면 "믿을 건 나밖에 없구나..." 나는 최초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파스칼이 아니라 데카르트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