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비행에 은유해보자. 첫 몇시간 동안 서양말과 한국말이 차이를 살피며 한국말 말차림법의 중요성 및 방향을 언급하며 도약했다. 하늘에 올라 한국말에 담겨 있는 존재와 인식을 살피며 한국사람의 머리속에 차려져 있는 한국말의 인문학적 바탕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비행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글말놀이'와 '말글놀이', 소통의 매체로서 '말'과 '글'의 본질을 통해 공자와 노자, 부처 등 축의 시대 각각의 성인들이 어떤 입장에 있었는지 나아가 그분들의 세계와 우리 세계가 무엇이 같고 다른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비행에서는 '사람의 사림 살이'의 바탕뜻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바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제 강의는 두번 남았다. 우리는 착륙을 준비해야 한다.
선생님은 착륙의 메세지로 '위함과 보람'을 칠판에 쓰고 관련된 주요 키워드를 나열하셨다. 위에 나열된 키워드가 오늘 강의의 졸가리다. 첫번째 키워드는 '주의'이다. 한자로는 '主義'로 '주인과 옳음'을 뜻한다. 그래서 '~주의'라 말하면 '~'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게 된다. 가령 '자본주의'라 말하면 '자본'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 '주의'라는 말은 번역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capitalism의 번역이다. 일본사람들은 capital은 '자본' ism을 '주의'로 번역했다. 그래서 capital+ism은 자본+주의가 되었다.
오늘날 '주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민족주의, 인종주의, 법치주의, 관료주의 등등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말에 '주의'라는 말을 붙힘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규정하려고 한다. '주의'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많이 쓰이기에 우리는 이 말의 바탕이 무엇인지 좀 더 또렷하게 알 필요가 있다.
나는 'ism'에서 'is'가 눈에 띄었다. 우리가 '이것'이 또렷하게 드러나면 '있음'이라며 명사형으로 말하듯이 be동사인 is가 명사로 드러난 상태가 ism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님은 이 말을 듣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다. "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다..."정도로 말씀하셨다.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subject이다. 이 subject 다음에 is(be동사)가 오고 목적적 대상인 object가 온다. 즉 서양말은 동사를 사이에 두고 subject와 object가 놓인다. 그럼 서양사람들에게 동사인 ism이 가르키는 것은 subject일까 object일까. 가령 'he made money'의 경우 여기서 made는 he일까 money일까. 당연히 money이다. '그'가 '돈'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있기에 '돈'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이를 선생님은 '보람'이라고 말하셨다. 그러니까 '그'는 '돈'을 '목적=보람'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번역한 '주의(主義)'는 '주어(主語)'와 '主'라는 글자를 공유하고 있기에 '돈'보다는 '그'를 가르킨다는 착각을 준다. '그'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그'를 버는 느낌이랄까. 뭔가 주객이 전도된 상태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자본'을 사람이 목적적 보람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임자가 되어 사람을 목적적 보람으로 삼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천민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 번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있을까? 선생님은 한국말과 일본말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으셨다. 서양말은 subject에서 동사를 거쳐 object라는 대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subject는 object를 보람으로 삼아 행동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한국말은 "그는 돈을 벌었다"라는 말에서 보듯 임자인 '그'와 보람이 되는 목적인 '돈'이 서로 붙어 있다. 그와 돈이 함께 '벌었다'는 사실을 풀어내기에 서양말에 비해 임자성이 또렷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말은 '그'와 '돈'을 모두 임자로 삼을 수 있다는 태도를 갖게 된다. 어느 한쪽이 임자가 되면, 다른 한쪽은 보람이 되는 상황이기에 '그'가 임자이면 '돈'이 보람이고, '돈'이 임자이면 '그'가 보람이 될 수 있다. 일본말은 한국말과 구조가 같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subject를 '주어'로 번역하듯 ism을 '주의'로 번역했고, 한국사람들은 이를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번역은 뭔가 큰 오해를 불러왔다. 서양사람들은 capitalism이라 말하면서 '자본'을 가장 큰 보람으로 삼았는데,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은 '자본주의'라 말하면서 '자본'을 가장 큰 임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subject를 '주어'가 아니라 '곧이말'로 바로 잡았듯이 ism도 '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말로 번역해야 한다. 선생님이 이 번역으로 '보람삼기'라는 말을 제안하셨다. 즉 capitalism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보람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갑자기 말을 바꾸긴 어려우니 일단 우리는 '주의'를 '주인=임자'가 아니라 '목적=보람'으로 여기면 된다.
위 그림에서 보듯 한국말은 '그'와 '부자' '디자인'이라는 함께하는 것들을 먼저 나열하고 맨 마지막에 '한다'라는 말로 풀어낸다. 영국말이었다면 "he design..."이라 말해 임자와 행위를 먼저 드러내고 목적하는 것들을 뒤에 나열했을 것이다. 한국말에 임자가 될 자격을 갖춘 것들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람들은 함께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임자로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람들은 어떤 특정 대상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것들을 존중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임자의 중요도는 구분된다. 위 다발말은 크게 4개의 임자가 있는데 임자성이 강한 순서로 나열하면 '말하는 사람-그-부자-디자인'이다. '말하는 사람'은 '으뜸 곧이말'인 '그'와 서로 관계가 된다. '그'는 '부자'라는 딸림 곧이말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부자'는 다시 '디자인'이라는 맞이말과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4개의 존재가 서로 함께하고 있다고 밝히고 마지막에 '한다'로 말할지 '안한다'로 말할지 결정을 내린다. 말을 끝마칠때까지 결정이 끝까지 유보된 상태랄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먼저 함께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맨 끝에 어떻게 풀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말도 나름의 법칙이 있다. 함께하는 것들 또한 무작위가 아니라 우선되는 것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된다. 한국말도 서양말처럼 먼저 곧이말이 나열된다. 물론 으뜸에서 딸림으로 가는 순서다. "내 머리가 아프다"에서 '내'는 으뜸이고 '입'은 딸림이다. "그 개는 기분이 좋다"에서 '그 개'는 으뜸이고 '기분'은 딸림이다.
곧이말 뒤에는 곧이말와 함께하는 맞이말이 등장한다. 맞이말도 크게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큰 목적과 작은 목표로 구분된다. 선생님은 이를 '위함'과 '보람'으로 구분하셨다. '위함'이 큰 목적이라면 이 목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목표가 '보람'이다. 위 다발말의 경우 그는 '부자가 되기 위한(위함)' 큰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작은 목표로 '디자인(보람)'을 말한 것이다. 그가 디자인을 보람으로 삼았다면 그는 '디자이너'가 되어 실제적 행위를 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의 목적인 '부자'를 이룰 수 있다.
강의를 함께 듣던 박스마스터 김승현 대표는 '위함과 보람'이 마치 경영학의 '미션과 비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는 늘 미션과 비전이 늘 헷갈려서 위함이 비전이고 미션이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이미 경영을 하고 있는 김승현 대표는 '미션과 비전'의 관계를 또렷하게 알고 있어 나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었다.
미션은 기업이 하고 싶은 목적이다. "우리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바꾸기 위해 교육사업을 할거야"는 미션에 해당된다. 교육사업을 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 즉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전이다. 미션이 하고 싶은 것이라면, 비전은 되고 싶은 것이다. 교육현실을 바꾸려면 먼저 학교나 학원 등이 되어야 한다. 학교나 학원이 되려면 선생과 학생 그리고 이를 운영할 관리자가 필요하다. 건물과 커리큘럼 등도 있어야 한다. 이때 선생, 학생, 건물 등은 목표=비전 달성을 위한 핵심가치로 삼은 것이다. 이 핵심가치를 이룸으로서 최초의 미션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미리' 세웠던 최초의 미션은 구체적인 비전과 더 구체적인 핵심가치를 이룸으로서 '이미' 된 것들을 만들어 간다. '이미'는 다시 '미리'의 바탕이 되어 미션의 방향을 재조정하도록 이끈다. 이렇듯 '미리'와 '이미'는 서로 상호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앞선 강의에서 살폈듯이 미리 생각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믿고 행동해 생각과 바람을 이루고, 여기에서 느껴진 바를 알고 다시 미리 생각하는 순환과정이다.
한국말로 치면 '미리'는 곧이말과 맞이말처럼 함께성을 나열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미'는 말끝에 나오는 풀이것말에 해당된다. '이미'라는 풀이가 끝나면 다시 미리 '함께성'을 나열함으로서 다발말(문장)은 뭉치말(단락)로 나아간다. 마치 지금 쓰는 이 글처럼.
다시 '임자'와 '보람'으로 돌아와보자. '임자'는 함께하는 곧이말과 맞이말이다. '보람'은 함께하는 말들이 풀어낸 이룸이다. 그래서 '미리'와 '이미'가 상호적이듯, '임자'와 '보람'도 상호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처럼 임자와 보람을 서로 헷갈려서는 안된다. '그'가 임자고, '돈'이 보람이듯 '그'와 '부자'라는 곧이말이 임자고, '디자인'인 맞이말이 보람에 해당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래서 주객이 전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가령 '인종주의'에서 '인종'을 보람으로 삼는 것은 그럴 수 있다. 백인들이 백인들을 위하고, 흑인들이 흑인들을 위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이런 경우 서로의 임자성을 존중하면서 보람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종' 자체가 임자가 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백인들이 자신들만을 임자로 여기고, 흑인들이 흑인들만을 임자로 여기면 서로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싸워 승패를 나누고 어느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종속되어야만 상황이 종료된다. 인종승리가 목적=미션이 되기에 판이 깨질 수 밖에 없다. 과거 조선말기 당쟁 싸움이 그랬다. 나라가 망해 판이 깨지더라도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오로지 승리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공부 목적은 '판차리기'이라고 말씀하셨다. 서양사람들은 오랜시간 나름의 판을 차려왔다. 그들은 분야를 구분하고 각 분야별로 깊게 생각해 '전문성'이라는 판을 꾸려왔다. 일본은 이를 가져와 번역하면서 나름의 판을 차렸다. 우리는 일본말과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이 번역해서 새롭게 차린 판을 믿고 그대로 가져왔다. 묻고 따지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학술용어는 거의 대부분 서양말이거나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위 그림에서 보듯 한글 프로그램에서 '한국사람'이라고 치면 아래 빨간줄이 나온다. 뭔가 잘못되었다며 수정할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인'이라는 한자어를 쓰면 깨끗하게 표기된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사람'을 위해 만든 것인데, '사람'이라는 말보다 '인人'이란 한자어를 선호한다. 참으로 우습고 창피한 일이다.
이성민 샘은 네덜란드 디자인철학자 키스 도스트의 <프레임 혁신>을 번역했다. 이 책은 디자인철학을 다루는 다소 학술적인 책이다. 이성님 샘은 '디자인씽킹'의 번역어로 처음 '디자인사고'를 염두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봉영 샘을 만나면서 '사유'나 '사고'보다는 '생각'이라는 한국말에 더 끌려, '디자인생각'으로 번역어를 바꾸었다. 이 경우에서 보듯 지금까지 한국사람들은 한국말을 학술용어로 삼는 것이 다소 어색했다. 일본 번역어가 중국과 한국에서 모두 쓰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한자어 때문에 소통의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이성님 샘은 오랜시간 의미적 유용성과 소통의 어려움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 한자어보다 한국말에 의미적 유용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기꺼이 '생각'이란 한국말을 번역어로 삼은 것이다.
선생님의 판차리기란 바로 한국말 학술용어의 도입이다. 일본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의 학술용어를 한자어로 번역했듯 선생님은 서양사람들의 학술용어와 일본사람들의 학술용어를 다시 한국말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말 바탕이 중요한 것이다. 늦은 만큼 장점도 있다. 일본사람들은 번역과정에서 서양사람들의 분절된 분야를 통합해 전체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선생님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사람들이 놓친 말들과 잘못 번역할 말을 바로 잡는다. 마치 세종이 한글을 만들때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등 여러나라의 문자를 비교해서 가장 탁월한 문자인 '한글'을 만들었듯, 선생님도 서양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의 말과 글을 비교해서 더 좋은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를 '판 차리기'라고 말한 것이다.
그 예로 든 것이 '얼이'이다. '얼이'란 무언가 '얼이는 것'이다. 마치 물이 얼음으로 바뀌듯 감각적 느낌이 머리속에서 이미지(심상)으로 바뀌는 것이 한국말로 '얼이'이다. 사람은 이 얼이를 바탕으로 대상을 무엇이라 여겨 알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선생님은 갑자기 나훈아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셨다. 잠시 노래를 감상한 뒤 선생님은 이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사랑'이란 말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뭔가 느낌은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사랑이란 말은 흐릿하고 모호하다. 그래서 이 말을 강조하기 위해 '사랑' '사랑' 몇번을 반복해 강조하고, '당신만을' '이 생명' '열정' 등등 온갖 말들을 불러와 내가 말하는 사랑이란 말에 겹친다. 말 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마져 가져와 겹침으로 '사랑'이란 말의 의미를 더욱 증폭시킨다.
선생님은 우리가 감각적 느낌으로 얻는 '얼이'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하셨다. 첫째는 어떤 의지없이 그냥 마주하고 있는 느낌으로 얻는 얼이이다. 이는 대상으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는 말처럼 어떤 소리를 다른 것을 빌려와 여기는 얼이이다. 사랑이란 말소리에 온갖 다른 말소리를 빌려와 하나의 얼이로 증폭시키는 것이다. 세째는 그림처럼 빌려온 것은 대상과 마주한 것처럼 표현하는 얼이다. 말의 경우 '반복'과 '겹침'의 과정에 의해 의미가 증폭되어 소통된다. 반면 그림은 반복과 겹침에 한계가 있다. 어떤 특정 대상을 가르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셜 맥루한이 '핫 매체'와 '쿨 매체'를 구분했듯이 말은 '핫'하고, 그림은 '쿨'하다고 볼 수 있다.
말은 두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논리적인 말과 자극적인 말이다. 자극적인 말은 잘 차려졌다기 보다는 감각 느낌을 자극하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자극적인 말은 감각과 지각적 효과는 높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금방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반면 논리적은 말은 감각-지각적 효과는 다소 떨어지지만 생각을 자극해 오래 지속된다. 소통에 있어서도 서로 사무칠 수 있게 된다.
그림은 세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전통적인 조각과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등장한 영상이다. 조각과 그림은 단순히 시각적 대상을 빌려와 그 대상인것처럼 표현했다면, 영상은 시각적 대상에 소리까지 빌려와 더 사실인것처럼 표현한다. 요즘에는 영상이 3D로 표현된다. 이를 '가상현실'이라 말하는데 가상이 마치 현실처럼 여겨지도록 만든 새로운 매체다. 영상과 가상현실은 기존의 거울적 모방, 빌려온 말과 글, 빌린것처럼 만든 짓까지 모두 내포하고 있다. 불과 수십년 사이에 조각과 그림의 매체가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생님은 사람이 대상을 느끼고 얼이는 전체 과정을 살피고 이를 다시 한국말로 번역할 표현을 찾고 계신다. 아래 도식은 그 과정을 잘 대변하고 있기에 여러분께 소개한다.
이어 디자인에서 학술용어인 한자어들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특히 '추상'과 '보편'에 대한 질문이 집중적으로 오갔다. 한 학생이 "추상으로 본질이 드러난다"는 표현이 너무 어려워 풀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추상'과 '보편'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어떻게 할 수 있냐는 질문이 있었다. 선생님은 추상은 결국 덕지덕지 붙어있는 장식이나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면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대답을 하셨고, 본질을 한국말로 하면 '밑바탕' 정도로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더불어 '추상'은 '뽑는 것'인데 주로 형태적 측면에서 쓰이는 말이고 '보편'은 '두루함'으로 주로 의미적 측면에서 쓰는 말이다. 그래서 추상화란 최소의 형태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풀 수 있고 보편화란 최소의 의미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풀 수 있다. 보편적 말은 최소의 의미만 남았기에 널리 공유되어 소통된다. 그리고 보편과 대비되는 말 '특수'는 '나름'이다.
문제는 그 누구도 어떤 대상에 있어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자신이 본질이라 여긴 것을 진짜 본질이라 여겨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진짜 본질이 있을까? 물의 경우 무엇이 본질일까? 증기? 물? 얼음? H2O? 사실 분자식은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물이 아니다. 본질은 늘 언제나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이 본질을 살펴 이름을 짓고 말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름을 통해 사람들이 그 대상의 무엇을 본질로 여겼는지 유추할 수 있다. 한국말 물은 '물다'이다. 한국사람은 물고 물리는 일로서 '물'이란 말을 만들었기에 한국사람에게 물의 본질은 무는 것이다. 한자로 물은 '水' '川'으로 흐르는 모습을 그린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사람들에게 물의 본질은 흐르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떤 대상의 본질을 늘 다를 수 있다.
그럼 '다르다'의 바탕은 무엇일까? 선생님은 다시 물을 예시로 들었다. 한국사람들은 증기와 물, 얼음이 달라지는 경우는 열을 가할때라고 생각했다. 즉 '달구면' 달라진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본질이 달라지는 경우 '다르다'라고 쓴 것이다. 한국말에서 '다르다'란 열로 달구어 본질적인 무언가가 달라졌을 경우에 하는 말인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두 말로 구성되어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사람들은 중국사람들과 달리 늘 바다를 끼고 살았다. 그래서 중국이 지평선 문화라면, 한국은 수평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람들에게 해와 달은 땅에서 솟고 지는 것이었지만, 한국사람에게 해와 달은 바다에서 솟고 바다로 지는 것이라 여겼다. 이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바다에서 중요한 지표는 바로 '섬'이다. 섬은 본래 '셤'으로 늘 언제나 서 있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본래 '셔'는 지붕을 올리때 쓰는 서까래로 집을 세울때 셔를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서다, 셔, 셤은 모두 바탕을 함께하는 말이다. 한국말 '집'은 '짚'으로 지붕을 지은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비와 이슬, 태양을 피하기 위해 지붕을 올렸다. 지붕을 만들기에 흔하고 용이한 것이 '짚'이었기에 주로 짚을 활용해 지붕을 올려 집을 지었다.
한국말에서 '산'은 '뫼'이다. 뫼는 '모이'이다.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것이 뫼인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로 내 쪽으로 '모+오+임' 것이다. 강의 '가람'으로 '가르다' '갈다'와 바탕을 함께한다. 강의 땅을 이쪽저쪽으로 가르며 지나간다. '가'는 가르고 가르키고 갈아서 지나간다. 그래서 '가'를 공유하는 말들은 모두 바탕을 함께한다. '가르치다'도 물론이다.
'해'는 '하+이'로 '하다'와 바탕이 같다. 이때 '하'의 모음은 약한 발음으로 '아래 아'이다. 어두울때는 무언갈 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무언갈 하려면 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해'와 '하다'는 바탕이 같다. '달'은 '달다'로 사람들은 날짜를 달때 달을 활용했다. '별'은 '벼르다'로 칼을 벼른듯 반짝거린다 하여 별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해와 달과 별로 시공간을 파악했다. 해가 뜨고 지는 낮길이와 밤길이를 통해 추하추동을 나누고, 달의 모양을 통해 날짜가 반복되어 지남을 알았다. 그래서 한해와 한달로 시간을 파악했다. 별은 일종의 좌표에 해당된다. 헝가리 문예사상가 게오르크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의 서문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한국말 바다의 고어는 '바랄'이다. 하늘의 고어는 '하랄'이다. '하날'의 '하'의 모음은 '해'와 달리 강한 'ㅏ' 발음이다. '하두두 많아서'라고 말할때 그 '하'이다. 사실 '바다'와 '하늘'을 표현하는 말은 많았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은 바다에 용왕이 산다고 여겼다. 용은 한자어이다. 한국말로 용은 '미르'다. '미리 생각한다'처럼 미래를 의미하는 '미리'가 '미르'가 된 것이다. '미륵'도 미래를 예언하는 부처다. 미르와 미륵은 미래를 예측하기에 위대하다. 요즘 사람들은 미래를 잘 맞추면 '용하다'고 말하는데 이 '용하다'는 '미르하다'를 한자로 쓴 것이다.
미래가 '미리=미르'면 과거는 '이미'이다. "난 그거 이미 했어"에서 말하는 '이미'이다. '미리'와 '이미'에서 둘의 관계는 이미 앞서 풀었으니 생략하겠다. '미리'가 용으로 여겨졌다면, '이미'는 이무기로 여겨졌다. 이무기는 과거의 업이 축적된 상태다. 그래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전설의 고향과 같은 이야기에서 과거의 업에 갇힌 이무기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몇가지 예를 더 들면 '새'는 새롭다에서 보듯 새로운 길로 가는 존재이고 '범'은 온갖 이미지가 버무려진 것이다. 그래서 범은 무섭고 신성하다. 곰은 겨울잠을 자듯 곰곰히 생각하는 동물이고, 나무는 땅에서 나서 위로 올라가는 '남기'라 말했다. 한국말에서 '기'는 수직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국말의 바탕을 알면 한국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여겼는지 그 본질=밑바탕을 다소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어린이'와 '어른'의 한국말 바탕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어린이는 본래 '얼인이'였다. 앞서 '얼이'에서 언급했듯 '얼인이'란 얼이 생기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른은 본래 '얼운이'였다. 얼운이는 '얼이'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즉 얼운이란 이쪽과 저쪽을 두루두루 얼운 사람이다. 한국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높혀 '얼운이=어른'이라 말했고, 후일 '어르신'이라 더욱 높혀 말했다.
한국말의 가장 큰 특징이 안과 밖을 이쪽과 저쪽인 속과 겉으로 여겨 둘을 어루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람들은 사실 안밖, 겉속, 이쪽과 저쪽을 잘 어룰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한국사람은 어른이 될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다. 한국말 바탕을 알면 그 자질이 더욱 피어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어른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