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마지막 강의'라고 썼다가 지우고 15강이라고 썼다. 왠지 마지막 강의라고 하니까 부정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 강의는 앞으로 이어질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인데... 아무튼 이런 우려를 할만큼 이번 강의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선생님은 지난해 한국말 말차림법의 큰 졸가리를 잡으셨다. 이 강의가 그것을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래서 강의를 준비할때 여러가지를 고려 했다. 강의 방식을 어떻게 할까? 누구에게 강의할까? 강의 정리는 어떻게 할까? 강의 촬영과 편집은 어떻게 할까? 그러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강의가 두차례 미루어졌다. 결국 애초의 계획을 접고 최대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강의를 강행했다.
강의가 시작될 무렵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해 홍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디자인학교 학생들이 주로 듣는 자리로 하고 원하는 사람 몇몇에게만 열어두기로 했다. 사람이 모일 수 없기에 강의방식도 바꾸어야만 했다. 나와 영상촬영자 등 최소의 몇몇만 현장에 나오고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시청했다. 당연히 현장감이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선생님의 말씀을 영상과 텍스트로 기록한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다.
영상은 후일 유튜브 디자인학교TV에 올릴 예정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강의를 들었던 분들을 고려해 영상을 어떤 방식으로 공개할지 논의 중이다. 텍스트는 브런치에 공개했다. 본래 텍스트는 녹취록을 풀 생각이었는데 녹취록은 영상기록과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강의 내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길지 않은 분량으로 부담없이 시작했다. 강의가 진행되면서 욕심이 생겼다. 점점 텍스트가 길어졌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다.
진상과 허상, 실상과 가상
수업 시작전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진상과 허상' '실상과 가상'에 대해 이야기다. 이 말들은 매체이론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선생님은 이 용어를 바로 한국말로 풀기에 앞서 한자어의 의미를 풀어서 또렷하게 분류하셨다. 진상(眞像)은 '참 진眞'이기에 속이 찬 것, 겉과 속이 같은 것을 말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경험가능한 것이다. 가령 '날아가는 비둘기'는 누구나 흔히 경험할 수 있다. 도시와 농촌에 날아가는 비둘기가 흔하기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허상(虛像)은 '빌 허虛'이기에 속이 빈 것,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경험불가능한 것이다. 가령 '날아가는 코끼리'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육중한 코끼리가 귀를 펄럭거리며 날아가면 좋겠다는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날아가는 코끼리'는 허상이다.
실상(實像)은 '열매 실實'로 우리 앞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상과 허상은 모두 실재로 존재할 수 있다. '날아가는 비둘기'의 경우 볼 수도 있고, 조각할 수도 있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다. '날아가는 코끼리'는 비록 실재하진 않지만 상상할 수 있기에 조각과 그림으로 '상像'을 표현해 우리 앞에 실재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진상과 실상의 조합은 '진-실'이고 허상과 실상의 조합은 '허-실'이 된다.
가상(假像)은 '거짓 가假'로 겉짓으로 가상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실상과 가상이 다른 것은 시공간차이다. 실상은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사람이 시공간을 함께 공유한다. 반면 가상은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사람이 시공간을 달리한다. 과거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공간과 달리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시공간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만들었다. 불교에는 가상 시공간이 훨씬 더 많다. 고대그리스에는 신들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구분되었다. 이렇듯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은 시공간을 함께하는 실상과 시공간을 달리하는 가상을 구분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실재하는 가상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디지털 공간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디지털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키아노 리브스는 실상과 가상 공간을 오간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실상의 시공간과 가상의 시공간 중 어떤 것이 실상이고 가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방영한 드라마 '더 킹-영원의 군주'에서 주인공 이민호는 대한제국 황제로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는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이라는 시공간이 따로 공존하는데 어떤 것이 실상이고 어떤 것이 가상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대한제국이 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과거 가상세계는 신화나 종교에 등장하는 말 그대로 가짜로 만들어진 거짓 세계였다. 그런데 디지털 시공간이 등장하면서 더이상 가상세계는 거짓 세계가 아닌 실재 세계가 되었다. 그래서 매트릭스와 대한제국과 같은 가상공간이 실재한다는 확신을 불러왔고 '평행우주이론'이라는 물리학적 가설까지 등장했다. 이 가상세계에도 '날아가는 비둘기'라는 진상과 '날아가는 코끼리'라는 허상이 모두 존재한다. 그래서 진상과 가상의 조합은 '진-가'이고 허상과 가상의 조합은 '허-가'가 된다.
선생님은 이 분류를 토대로 진상과 허상, 실상과 가상을 다시 한국말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 계신다. 'image'의 한국말을 '얼이'로 놓고 경험가능한 진상은 '찬 것', 경험불가능한 허상은 '빈 것', 바로 같은 시공간에서 경험이 가능한 실상은 '바로 것', 상상속의 시공간에서 빌려와야만 경험이 가능한 가상은 '빌린 것'으로 번역해 분류하셨다. 자세한 분류는 아래 소개한 표를 참고하면 된다. 그러나 아래 소개된 표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말 용어와 분류는 좀 더 섬세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한국말 말차림
나는 매학기 시각언어 이론강의에서 기호학을 소개한다. 기호학의 주요 키워드는 '기호, 기표, 기의'이다. 고백하건데 나는'기호, 기표, 기의'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상 이 말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 그래서 이런저런 맥락과 사례를 들어 대충 흐릿하게 퉁치고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 이 말들의 한국말 번역을 알게 되면서 기호학을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기호(記號)'는 영어 'sign'의 한자 번역이다. 한자어를 한국말로 풀면 '불러와 기록'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기호'의 한국말은 '부른 것(부름것)'이다. 이 기호는 '기표+기의'로 이루어져 있다. 기표(記標)는 '나타내 기록'한 것을 말한다. 한국말로 풀면 겉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기표의 한국말은 '겉보기'이다. 기의(記意)는 '뜻이나 기억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뜻이나 기억은 겉이 아닌 속안에 들어있는 것이기에 기의의 한국말은 '속들이'이다. 즉 한자어 '기호=기표+기의'를 한국말로 번역하면 '부름것=겉보기+속들이'가 된다.
'눈으로 보다' '귀로 들어보다' '맛보다' '만져보다' '생각해 보다' 등에서 알 수 있듯 한국말 '보기'는 단순히 시각적 감각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과 생각에 두루 쓰이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말 '보기'는 경험전반을 의미한다. 그래서 겉보기는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경험'이다. 속들이는 속속들이 들어가 있는 것인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없다. 오로지 겉으로 드러난 겉보기(기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부름것(기호)는 겉보기(기표)를 통해 속들이(기의)를 추론한 것이다.
위 사례에서 보듯 영어는 대부분 한자어로 번역되어 있기에 그 의미가 늘 흐릿하다. 나는 한자의 요소요소를 뜯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 의미가 흐릿하다. 하물며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들이 이 말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한자어들을 한국말로 풀면 상황이 달라진다. 말의 의미가 또렷해지면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그 한국말의 바탕까지 말면 비로소 "나는 알고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최봉영 선생님의 수업은 여기에 의의가 있다.
인문학의 한자용어들, 기호학의 한자 용어를 한국말로 바꾸자는 말이 아니다. 한자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말로 번역해야만 한다. 나아가 한국말의 바탕까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말의 바탕을 이해하고 있기에 영어용어를 쓰던 한자용어를 쓰던 상관없다. 말을 하는 사람이 적당하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한자어로 된 학문용어를 한국말로 번역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제대로된 이해와 앎의 기회도 가질 수 없다.
기호학은 스위스언어학자 소쉬르에서 비롯되었기에 주로 서양말로 발음된다. 랑그(Langue), 파롤(Parole), 싸인(Sign), 씨니피앙(signifiant), 씨니피에(signifié) 등등. 앞서 싸인(기호)과 씨니피앙(기표), 씨니피에(기의)는 풀었으니 이번엔 랑그와 파롤을 보자. 랑그의 한자어 번역은 '언言'이다. 어語는 '말 언言' 옆에 '나 오吾'가 붙어있어 '나의 말'이 된다. 이 '어語'가 바로 파롤이다. 그래서 '언어'는 '언+어'로 랑그와 파롤을 포함하는 말이다.
'언'은 한국말로 '말'이다. '어'는 한국말로 '말씀'이다. '말씀'은 말을 쌓는 것을 의미한다. 앞선 강의록에서도 소개했지만 다시한번 언급하면 말은 아래에서 위로 쌓는다. 말의 바탕의 '말'의 세계이다. 이 말 바탕에 '서브젝트=곧이말'을 먼저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논리적으로 말을 차곡차곡 쌓는다. 논리가 없으면 그 말은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말을 쌓는 행위와 유사하기에 말쌓음=말씀이 된다. 이 말씀의 서양말이 바로 파롤이다. 논리적으로 쌓인 말씀=파롤은 바로 사람이 진상과 허상, 실상과 가상을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면 '이야기'가 된다. 영어로는 스토리, 한자어로는 담화이다. 이야기는 여러개의 말뭉치로 이루어져 있다. 영어에서 패러그래프, 한자어로 단락, 문단이라고 말한다. 이를 한국말로 '뭉치말'이다. 말뭉치가 아니라 뭉치말이라고 한 것은 뒤에 나오는 용어들과 라임(가락)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뭉치말은 여러개의 다발말로 이루어져 있다. 다발말은 한자어로 문장, 영어로 센텐스에 해당된다. 다발말은 매듭말로 나누어질 수 있다. 매듭말은 '갈 수 있다' '빨리 간다'처럼 몇개의 말이 연결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말이다.
한국말과 영어(중국말)이 가장 다른 특징은 '마디말'이다. 영어는 'I go to school'처럼 각각의 낱말(word,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한국말은 '나는 학교에 간다'에서 보듯 영어나 중국말처럼 '낱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나는' '학교에' '간다'는 낱말이 아니다. '나는'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각각의 낱말인 '나'와 '는'은 이해하기 어렵다. '간다'도 '가+ㄴ다'이다. 한국말에서 '가'와 'ㄴㄷ'는 그 자체로 의미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선생님은 한국말의 최소 단위를 '낱말'이 아닌 '마디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셨다. '마디말'은 선생님이 새로 지은 이름이다.
낱말로 이루어진 영어와 중국어는 품사의 구분이 가능하다. 영어는 8개의 품사로 낱말의 역할을 구분한다. 하지만 낱말이 아닌 마디말로 이루어진 한국말은 품사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씨말로 마디말의 역할을 구분하고 분류하셨다. 가령 '나는' '학교에' '간다' 마디말은 다시 '씨말'로 구분된다. 씨말은 '앛씨말'과 '겿씨말'로 구분되는데, '나는'에서 '나'는 앛씨말이고, '는'은 겿씨말이다. 앛씨말은 말의 바탕이고 겿씨말은 말의 구실이다. '나는'이라고 말할 경우 '나'는 내가 말하는 바탕이고, '는'은 이 바탕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학교에'의 경우 '학교'는 앛씨말로 바탕, '에'는 '겿씨말로 구실에 해당된다.
국어사전은 그 나라의 말을 구성과 분류를 기록한 귀한 책이다. 영어사전은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낱말은 8개의 품사(word class)로 역할이 구분되어 설명된다. 한국말사전도 현재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낱말을 9개의 품사로 역할이 구분되어 설명된다. 앞에서 말했듯 본래 한국말은 낱말이 아닌 마디말로 구성되어 있기에 현재 한국말사전의 구성과 역할 설명은 한국말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한국말의 구성과 역할을 제대로 담으려면 한국말을 앛씨말, 겿씨말, 마디말로 분류해 설명되어야 한다. 아래 두 개의 표는 그 구성과 역할을 분류한 것이다.
한 학생이 선생님 설명을 듣다 질문을 했다. "왜 선생님은 '먹다'처럼 '다'가 아니라 '먹지'처럼 '지'를 말의 기본형(원형)으로 여기시나요?" 선생님은 기본형은 본래 두루 쓰이는 말하셨다. 영어의 경우 기본형은 'can not eat'처럼 부정형 뒤에 나온다. 한국말도 기본형은 부정형에 등장한다. "먹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먹지'처럼 현재형에 '먹지'라는 말이 쓰인다. 그래서 '먹지'의 '지'가 한국말 기본형에 해당된다고 대답하셨다.
덧붙여 한국사람은 오랜시간 말과 글이 달랐다. 말은 한국말을 쓰고, 글은 한자를 빌려썼다. 일본도 그랬다. 그래서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은 영어의 grammar를 문법(文法)이라 번역했다. 하지만 영어의 grammar는 글이 아니라 말을 바탕에 놓고 만든 규칙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문법(文法)이 아니라 어법(語法)이라 번역한다. 20세기 초 주시경 선생님의 제자들도 문법(文法)이라는 말보다는 '말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이를 다시 '말차림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수업의 제목이 '한국말 말차림법'이다.
한국말 말차림법
이제 한국말 말차림법의 기본 골격을 살펴보자. 영어와 중국말의 경우 먼저 subject가 나오고 바로 뒤에 verb가 나온다. 그리고 나서 뒤에 object 등이 나열된다. 그래서 영어와 중국말은 subject가 가장 중요하고 verb뒤에 나오는 말들은 덜 중요하다. object는 subject가 행동하는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영어와 중국말은 자연스럽게 능동적인 주체, 조작적인 주체성이 강조된다. subject가 object를 지배해야지 object에 subject가 휘둘리면 안된다.
이런 점에 있어 한국말은 영어, 중국말과 크게 다르다. 한국말은 영어처럼 subject가 object를 지배하지 않는다. 한국말에서 subject는 이쪽이고 object는 저쪽이 되어 서로 어울려 행동을 풀어간다. 그래서 영어나 중국말처럼 말의 앞에 verb가 나오지 않고 가장 마지막 말에 함께하는 것들이 일과 행동을 풀어내는 말이 나온다. 이렇듯 영어와 한국말은 말의 맥락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한국말의 말차림법에서 subject를 주어로, verb를 동사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선생님은 이를 대체하는 말로 '곧이말' '맞이말' '풀이말'이란 말을 만드셨다.
영어와 중국말의 가장 큰 특징이 '주체성'이라면 한국말의 가장 큰 특징은 '함께함'이다. 위의 표에서 보듯 한국말은 '함께 하는 일'을 표현한다. 함께하는 대상은 함께 것들이다. 크게는 이쪽것과 저쪽것이 있고 나아가 요쪽것과 그쪽것도 있다. 쪽은 함께하는 것들은 기본 단위로 여러 쪽들이 나누어져 서로 함께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자신을 함께하는 하나의 쪽으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현재 한국사람들이 코로나19 상황에 잘 대처하는 것도 사태 초기부터 한국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하나의 쪽으로 여겨 크게 위험한 상황이 아님에도 다른 쪽들을 위해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거리두기를 실천한다. 반면 서양사람들은 자신을 쪽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여겨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코로나19 초기 상황에서 서양의 많은 국가들은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 실천을 강제했다.
위 3개의 문장은 한국말의 말차림의 기본을 잘 드러낸다. '나는 눈이 보인다'에서 '나는'과 '눈이'는 모두 곧이말에 해당된다. 두 곧이말을 구분하기 위해 '나는'은 으뜸-곧이, '눈이'는 딸림-곧이로 이름 지었다. 눈은 나에게 딸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눈이 보인다"는 '나'와 '눈'이 함께 '보이'는 일을 풀이한 것이다. 그래서 '보인다'는 풀이-마디말이다.
"나는 산이 보인다"의 경우 '산'은 나에게 딸린 것이 아니다. 고개를 돌렸는데 우연히 산이 앞에 있어 산이 보이는 경우 산이 내 머리에 이미지로 얼려 있기에 '산이'는 얼임-곧이말이다. 반면 "나는 산을 본다"는 내가 적극적으로 산을 보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여기서 "산을"은 곧이말이 아니라 내가 마주하고 있는 "맞이말"이다. 곧이말과 맞이말의 경우 '나'와 '산'이 서로 마주하면서 '본다'라고 풀어낸다. 즉 으뜸-곧이말과 얼임-곧이말의 경우 '보인다'처럼 으뜸-곧이가 수용의 태도로 함께하지만, 곧이말과 맞이말의 경우 '본다'처럼 으뜸-곧이가 작용의 태도로 함께한다.
'풀이 마디말'은 주체가 어떤 행위를 하는 verb라기 보다는 이쪽과 저쪽, 사람과 사물이 서로 함께하는 행위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행위성만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래서 '풀이 마디말'은 일과 꼴 전반을 풀어낸다. 아래 표는 곧이쪽 마디말과 맞이쪽 마디말, 함께 풀이하는 풀이 마디말의 갈래를 정리한 것이다.
영어는 8개의 낱말 품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말은 크게는 3개 작게는 21개 마디말로 이루어져 있다. 두 말의 요소와 구성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단순히 문법, 말차림법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바탕이 다름을 의미한다. 말의 논리적 바탕이 다르다는 것은 곧 생각의 논리적 바탕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도 서양사람이나 중국사람들처럼 나름대로의 논리적 바탕이 있다.
지난 1500년동안 한국사람들은 서양과 중국의 논리를 가져와 인문학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도덕의 체계를 세웠다. 앞서 말했듯 이 체계는 한국말의 바탕과 크게 다르다. 서양사람과 중국사람들의 기본 논리는 주체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의 바탕은 주체성보다는 이쪽과 저쪽이 함께함에서 비롯된다. 지금까지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말 바탕에 숨겨있는 함께성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함께성이 아닌 주체성에 근거해 모든 것을 판단해 왔다. 그래서 말과 글 나아가 행동이 모두 따로따로 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말 말차림법은 단순히 한국말의 구성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람의 바탕논리, 한국사람의 사회적 성격을 알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만약 한국사람들이 한국말에 숨겨진 '함께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앞으로 미래 한국사람들의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해 얻은 것
마지막으로 이 강의를 통해 내가 얻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15번의 강의를 들으며 크게 4가지를 느꼈다. 첫번째는 의외로 한국말 번역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자어'를 한국말 번역의 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자를 공부했다. 한자를 알게 되면서 사람과 동네이름, 간판에 쓰인 글자, 책에 쓰여진 글들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글에 눈을 뜬 기분이랄까. 그래서 한자어를 알면 한국말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한국말에 눈을 뜨고 나니, 한자어는 한국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자어의 의미도 흐릿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령 '학습'은 한자어로 '學習'인데 이를 '배우고 익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배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학습'이라고 다시 한자어로 대답한다. 배움의 말바탕이 '(몸에)배이다'라는 사실을 모르니 '배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시 한자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학學'은 '배우다'가 아니라 '깨닫다'에 가깝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배우다'가 무슨 뜻이고, '깨닫다'가 무슨 뜻인지 모르니 '학學'을 어떤 말로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 묻고 따지지 않고 그저 누가 말하는 것을 따라갈 뿐이다.
'학습'은 '배우다'니 '깨닫다'니 한국말로 풀어주니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이다. 번역어 중 한국말 자체가 없는 것도 많다. 현재 서양말과 한자어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영어 communication의 한국어 번역은 '소통'이다. '소통'은 흔히 쓰는 한국말이지만 그 바탕은 한자이다. '소통疎通' 한자어를 한국말로 풀면 '트이고 알리다'이지만 이 한자어 풀이로는 그 말뜻을 담아내지 못한다. 한자를 하나씩 뜯어서 바탕을 살펴도 그 말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소통'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communication이라고 대답하고, communication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소통'이라고 대답하는게 현실이다.
지난 강의에서 풀었듯 '소통'이 '사무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비로소 '소통'의 의미를 알게 된다. '사무침'은 '서로 묻히는 것'이다. 한국말에서 소통은 '서로에게 묻히는 행위'이다. 소통은 그나마 느낌이 오는 말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기표'는 어떤 느낌조차 없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시니피앙'을 그저 '기표'로 번역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깨닫고 익히다'나 '사무침'처럼 한국말로 '기표'를 설명조차 하지 않기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길이 없다. 기표의 한국말이 '겉보기'라는 것을 알고, '겉'의 바탕이 '겉짓'이고 '보기'의 바탕이 '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아가 겉이 '긋다'와 바탕이 같고 '보'와 '기'의 바탕뜻을 알게 되면 '겉보기'의 뜻을 또렷히 알게 되고, '기표'와 '시니피앙'의 뜻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운이 좋다면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시피니앙'과 중국사람들의 '記標', 한국사람들의 '겉보기'의 차이도 알 수 있다.
나는 '비행기'라는 한자어를 '날틀'로 바꾸자는 말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소통', '기표'도 마찬가지다. '비행기'든 '소통'이든 '디자인'이든 한국사람들이 일상에서 말하고 있다면 이 또한 한국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한국말의 뜻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비행기야 딱히 알 필요는 없지만, 흔히 쓰는 말인 보편어인 '소통', 학술용어인 '기표'는 한국말을 알면 훨씬 이해가 쉽다. 특히 학문이나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또렷히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제대로 기록하고 제대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서양말은 대부분 한자어로 번역된다. 그것이 번역의 끝이라 생각한다. 나는 한자어를 알게 되면서 서양말을 한자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과연 이 한자어의 본래 바탕뜻을 알고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지도 못한 말을 끌어다가 말을 만들어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내가 서양말을 모르니 둘을 비교하기가 어려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한자어 번역을 읽었다. 하지만 한국말을 알게 되면서 내가 알고 있는 한자어보다 한국말이 더 또렷하게 이해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아가 한국말 바탕을 알게 되면 한국말도 외국말처럼 더 깊게 이해해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즉 서양말은 한자로 번역되는 것을 넘어 한국말 나아가 한국말 바탕까지 나아갈때 우리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는 안과 밖의 논리이다. 작년 레이코프와 존슨의 <몸의 철학>을 읽으면서 사람은 크게 3가지 경험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뒤, 위아래, 안밖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한국말을 배우면서 이 기본 경험들이 단순히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논리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3가지 경험을 학문 분야와 매칭하면, 앞뒤는 '역사'적 관점이다. '나'라는 현재를 기준으로 앞은 미래고, 뒤는 과거다. 그래서 앞뒤의 논리는 역사의 논리이고 실제로 역사철학의 은유적 개념으로 많이 사용된다. 위아래는 '철학'적 관점이다. 플라톤의 <국가> 초입에 소크라테스가 시장에 '내려갔다'가 케팔로스옹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분석한 학자들은 '오르고 내리는' 표현들을 아주 중요시 여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도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은유를 사용한다. 이렇듯 위아래 은유는 무언가 정신적으로 고양되거나 공공성을 띄는 상황에 많이 사용된다.
과거 나는 디자인을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앞뒤의 '역사'와 위아래의 '철학'을 주로 공부했다. 그러다 디자인학교 철학선생님인 이성민 샘을 만나고 '옆'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생님의 '옆' 관점은 새롭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디자인학교 친구들은 의식하진 못했지만 '옆'을 보며 살아왔기에 이성민 샘과 우리는 결국 함께하게 되었다.
최봉영 샘은 나에게 안과 밖의 논리를 깨닫게 해주셨다. 앞뒤와 위아래의 관점이 다소 일방적인 관계라면, 옆과 안밖의 관점은 함께하는 관계다. 한국말은 안과 밖의 관계를 중요시여긴다. 한국말 긍정과 부정도 '이다/안이다'로 말해진다. 안과 밖이 서로 일치하면 '이다'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아니다=않이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한국말에서 안과 밖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누어져 함께한다. 이를 '겉과 속'이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는 겉과 속이 함께하고 있다. 존재의 속이 꽉 차 있으면 참이라고 말하고, 차 있지 않으면 '속이다' 혹은 '겉짓이다(거짓이다)'라고 말한다.
반면 서양말과 중국말은 안과 밖의 논리보다는 앞뒤와 위아래의 논리가 강하다. subject 뒤에 바로 verb가 이어져 앞에서 뒤로 말이 진행된다. 이들에게 주어는 '온'인 상태로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안'만을 생각하거나,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일방적 방향성을 강조한다.
세번째는 '함께함'의 관계다. 한국말은 영어와 중국말과 달리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되어 함께하는 상황을 풀어낸다. 이런 관점은 최근 세계 사회학과 철학의 트랜드이다. 환경파괴가 지속되면서 지구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존재)들이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의 독보적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서양말의 구조상 이 주장이 힘을 받긴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말은 말 그 자체로 '함께함'을 전제하기에 한국사람들은 함께함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늘 자신을 전체의 한쪽으로 보고 나와 전체가 함께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말을 할때 함께하기에 적절한 상황을 모색하면서 말이 끝날때까지 결정을 유보한다. 서양말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선 답답하겠지만 이런 한국말의 구조도 꽤나 유용성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는 한국말이 아주 유용하다. 함께하는 것들을 최대한 나열한 뒤 풀어내는 결정이 맨 뒤에 이루어지기에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이 이렇게 빨리 근대화와 세계화에 적응하고 오히려 앞서나가게 된 것은 어쩌면 한국말 덕분인지도 모른다. 현재 코로나19 사태에 적절히 잘 대응하는 것도 한국말의 함께성 구조가 한국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아서인지도 모른다.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을 꼽으라면 이구동성으로 '적절성'을 강조한다. 이런점에서 한국사람들은 모두 디자인을 잘 할 수 있는 바탕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 앞에 놓여진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성민 샘이 말하듯 이 문제들은 모두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다. 이 난제들을 해결하려면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나아가 결정을 유보하고 함께하는 것들을 배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말이 갖고 있는 사상적 디자인적 함의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네번째는 한국말을 통해 시각언어 이론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큰 도약을 한듯 싶다. 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모두 공유하는 디자인개론서를 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한국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지금까지 시각언어 이론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가장 큰 장벽은 '이미지가 과연 언어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서이다. 상식적으로 언어하면 먼저 말과 글이 떠오른다. 여타 학문들은 모두 이 말과 글이란 언어를 공유한다. 그런데 예술과 디자인은 말과 글보단 이미지를 언어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말과 글처럼 언어로서 작동하는지 여부, 언어로서 작동한다면 과연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알아야만 했다.
서양말은 글, 그림, 그릇에 해당되는 말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한국말은 글과 그림, 그릇이 '그'라는 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그'가 바로 시각언어 이론의 실마리다. 글, 그림, 그릇, 그것은 모두 '그'라는 발음을 공유하는 '그'가족이기에 '그'라는 말의 바탕을 알면 글과 그림, 그릇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나아가 이 말들이 언어로서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도 알게된다. 이를 통해 말과 글을 연구한 기존 언어학과 다른 유형의 이미지 언어학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지난 3~5월까지 난 시각언어 이론을 쓰는데 몰두했다. 지금 쓰고 있는 한국말 말차림법 정리와 함께 지난 몇달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듯 싶다. 머리 속에는 온통 시각언어와 한국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생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매주 한두편의 긴 글을 썼다. 마치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듯 생각들을 한가닥 한가닥씩 글로 풀어내었다. 시각언어 이론은 A4 약 100페이지 분량의 글이 되었고, 한국말 말차림법도 비슷한 분량으로 쓰여진듯 싶다. 그리고 바로 지금 마지막 한가닥의 실을 풀어내 무거운 생각의 짐을 내려놓는다. 지금까지 귀한 이야기를 해주신 최봉영 선생님과 끝까지 강의를 경청해주신 학생들 그리고 긴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진심을 담아 말씀을 올린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