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subject)가 말하는 사람에 근거하듯, 주체도 근거가 있어야 한다. 신라 이후 중국의 문자가 전격 도입되면서 약 1500년간 한국사람의 근거는 중국을 경유한 불교나 유교였다. 200년전 기독교가 들어오고 개항이 시작되면서 서양이 새로운 근거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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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이 서양세력에 무너지자 한국사람의 근거는 유럽과 미국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으로 근거가 바뀌는듯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해방후 미국이라는 근거는 지속되었고, 그 대리근거가 일본에서 군부로 바뀌게 된다. 이 흐름은 지난 박근혜 정권까지 지속되었고, 그 마지막 몸부림이 태극기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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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한국사람들이 근거로 삼았던 국가나 문명의 민낯을 목격했다. 나는 이 사태가 아주 걱정이다. 한국사람이 지난 1500년 동안 외부에서 찾았던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니체가 종교를 상실한 느낌이랄까. 이제 한국사람도 새로운 근거를 찾아야 한다. 니체가 울부짖었듯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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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이 사실을 깨달았던듯 싶다. 어떻게 깨달았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락음악에 빠져서 그랬던듯 싶다. 아무튼 모든 근거를 상실한 한국사회를 살아온 나는 그 근거를 과학에서 찾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학문이 아니라 이 학문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 태도다. 배우는 동시에 매사 의심하고 엄밀하게 묻고 따지고 풀면서 또 계속 의심(반증)하는 태도다. 나는 이 태도만이 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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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는 이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나서가 아닌듯 싶다. 그때부터는 사람의 생각, 논리에 근거한 과학적 태도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느낌에 새롭게 눈을 떳고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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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최봉영 샘과 '초기값'에 대해 긴 대화를 했다. 이 초기값이 바로 근거다. 한국사람이 지금까지 가졌던 근거는 사실 한국말이어야 하는데 신라 이후 중국한자, 서양말, 일본번역어 등이 한국말의 근거를 대체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자신의 근거를 늘 외부에 기대어 살아왔다. 최봉영 샘은 이 외부 근거들을 걷어내고 그 바탕 아래 숨겨져 있던 한국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걸 본 사람은 선택을 할수 있다. 나의 근거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그냥 덮고 기존대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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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꾸는 선택을 했다. 그 이유는 과학 이후 새로운 근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과학적 태도를 한마디로 하면 '인과성'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인과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그 대안을 한국말에서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한국말의 특징은 인과성이 아닌 함께성에 근거한다. 어쩌면 내가 인과성을 의심한 이유도 락음악에 아닌 한국말 사용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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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함께성이 인과성의 약점을 훌륭히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아 흄의 인과율 비판에 잠을 못 이루었던 칸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이제 한국사람의 주체성은 투트랙으로 간다. 하나는 오랜 전통의 인과성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말(교착어) 전통의 함께성이다. 이게 바로 K-리버럴아트(인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