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디자인사학회 2차 학술대회 '발표자료집'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와... 말이 안나온다. 아... 한국 디자인사회에 이런 논문이 나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에는 세명의 학자가 발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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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주로 라캉과 지젝, 아렌트, 벤야민과 같은 현대 철학을 번역하다가 최근 디자인철학을 번역하기 시작한 이성민 샘의 글이다. 디자인 분야와 인연을 맺은 이성민 샘은 이론적 철학자에서 실천적 철학자로 거듭나고 있다. 선생님은 본인이 직접 설계한 '평어'라는 언어 디자인 실천 사례를 소개한다. 현재 한국말은 '존댓말'과 '반말'로만 구분되어 있는데, 존댓말은 어색하고, 반말은 친근하면서 동시에 적대적이다. 선생님은 두 언어관계 사이에 틈을 노려 '평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디자인한다. 언어관계라는게 그렇듯,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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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인 이지원 샘의 글이다. 나는 이 논문을 읽는내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한글의 조형성에 대해 이토록 디자이너다운 접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지원 선생은 언어학자가 아니라 소리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한글'을 분석한다. 직관적이고 느낌적인 접근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기존 학설에 새로운 학설울 더하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과 생각을 보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용어들이 죄다 한자어라 어렵다. 어쩌겠는가... 우리에겐 한글과 언어를 설명할 한국말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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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성민 샘의 논문은 최봉영 샘의 '존비어체계' 개념에서 시작한다. 두번째 이지원 샘 논문의 한자용어들을 한국말로 바꾸는 작업은 최봉영 샘에게 기대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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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세번째는 최봉영 샘이 직접 나선다. 논문 제목은 <사람은 무엇을 욕망하는가>이다. 이 논문에서 선생님은 기호를 '니름것'으로 감각은 '느낌 알이'로, 지각은 '느낌 알이 살이'로, 생각은 '생각 알이 살이'로 표현한다. '디자인'을 '기호'와 '욕망' 사이의 맥락적 흐름에 놓는다. sign과 design 나아가 desire가 연결되는 접근은 디자인 분야에서 최초이다. 소쉬르와 프로이트가 바우하우스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또한 논문 대부분의 용어가 순수 한국말이다. 이런 접근 또한 최초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논문이 되었다. 물론 한자어와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색할 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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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학자'들이 남의 것을 옮기기 급급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만족하는 것을 보면서 '학자'를 포기하고 그냥 '디자이너'로 남기로 결심했다. 물론 공부는 계속 하고 있다. 나름대로 20년 안에 예술과 디자인의 바탕 이론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학자'보단 '디자이너'가 낫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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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분이 좀 색다르다. 이번 학술논문에서 진짜 학자들을 만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뭔가 나도 진짜 학자가 된 양 어깨가 으쓱해진다. 음... 이제 비로소 한국 디자인 분야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기분이랄까. 이틀 뒤 시작하는 한국디자인사학회 2차 학술대회는 왠지 기쁜 날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