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학당을 하는 이유

by 윤여경

나는 요즘 과학책만 읽는다. 옛날에는 고전부터 시작해 정치, 경제, 사회, 철학, 역사 등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었는데 요즘은 그런 책들이 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냐면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 탓인지 그들의 프레임이 낡은 탓인지... 인문학 책을 바탕으론 세상이 잘 읽히지 않는다. 아마 수십년전에 살았던 분들은 비트코인이나 트럼프 현상, BTS의 빌보드차트를 석권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험을 해도 전혀 이해가 안갈 것이다. 온갖말과 논리를 끌어와 예외적 현상이라며 어떻해든 현실을 부정하려 할지 모른다. 나도 한땐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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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였나... 나는 좌절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공허했기 때문이다. 한것도 많고, 하고 있는 것도 많고, 할 일고 많은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공(空)'은 안으로 빈 것이고, '허(虛)'는 밖으로 빈 것이다. 내 경우는 '허'보단 '공'에 가까웠다. 한동안 텍스트중독에 가깝게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읽는 것은 깨닫는 것이고, 쓰는 것은 익히는 것이다. 미친듯이 정보들을 안에 들이다 부었는데 몸에 배이지 않았다. 몸땅 어딘가로 새어 나간 기분이다. 그래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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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 보면 아래 일부가 깨진 것이 아니라 아예 밑둥이 없었던듯 싶다. 내가 말하고 읽고 쓰는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니 아무리 많이 읽고 쓴다고 해서 그것들이 내 안에 남아있을리 없다. 방귀처럼 증발될 뿐. 결국 남은 것은 허약한 체력과 공허하고 허탈한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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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중반즈음 이성민 샘이 '은유론'에 빠졌다. 함께하는 분이니 이분의 생각을 좀 이해해야겠다 싶어 책을 추천받았다. 으악 무려 8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고 읽는 순간부터 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바로 '통섭'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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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은 사회진화론으로 유명한 윌슨의 책을 최재천 샘이 번역한 말이다. 윌슨은 이 책에서 생물학을 중심으로 모든 과학과 사회학, 인문학을 통합하자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막상 읽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문학자들은 윌슨을 '환원주의'라고 지적하며 '창발' 개념으로 맞섰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윌슨의 주장처럼 통섭을 해야 '창발'이 일어나지, 지금처럼 가만두면 오히려 각자의 환원주의 함정에 빠질 것이 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윌슨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나아가 진화론에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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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윌슨의 방향은 옳았지만 방법은 틀렸다. 생물학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중심으로 뭉치자고 주장했어야 한다. 문제는 그 '언어'가 무엇이냐에 있다. 언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통섭을 해... 구심점 자체가 아예 없는데... 그런데 이와 비슷한 분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사람과 닮은 컴퓨터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람과 똑같은 컴퓨터 아니 사람보다 뛰어난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무엇이냐에 있다.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똑같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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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성민 샘이 추천한 책, 레이코프와 존슨의 <몸의 철학>에는 이와 관련된 질문에 나름의 대답이 써 있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언어는 사람이고, 사람은 언어야" "통섭을 주장할 것도 없이 이미 과학자와 기술자, 인문학자들이 언어를 중심으로 통섭하고 있고, 그 성과도 많아" 허허허... 이렇게 단순한 대답을 몰랐다니... 하지만 내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마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손에 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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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 일단 신경학과 뇌과학, 중세부터 현재까지의 언어학(서양과 중국)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다. 더불어 고전과 철학사에 대한 개념을 갖춰야 하고 욕심을 조금 더 내자면 생물학과 물리학에 대한 기초적 상식이 있어야 한다. 다행이 나는 이 상식들을 어느정도 갖춘 상태였다. 줄을 박박치고, 메모를 열심히 하며 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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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은유언어학과 신경언어학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다룬다. 이 언어학을 이해하려면 언어학과 경험론의 흐름을 조금 이해해야 한다. 서양에서 언어에 대한 탐구는 중세 보편논쟁부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를 지나면 어법이 등장하고, 화려한 희극과 출판, 편지, 논쟁적 학문 등에 힘입어 언어가 풍성해졌다. 점점 복잡해지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학자들은 '어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게 어디 쉽나... 그러자 방향을 바꾸어 언어를 그 자체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언어는 일종의 건축적 구조야. 낱말(단어)는 벽돌이고, 생각은 벽돌쌓기고, 책은 건축이야. 등등 이런 식으로 언어를 이해했다. 이를 미술에서는 구성, 구축이라 말했고, 인문학에선 구조라 말했다. 구조니 후기구조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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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비트겐슈타인의 비아냥은 금새 잊혀지고, 미국에서 촘스키가 등장해 분석언어학이 유행했다. 아이디어는 이런식이다. "언어의 구조를 알려면 수학처럼 접근해야해! 왜냐면 수학은 보편적 언어거든" 사실 이런 아이디어는 플라톤부터 데카르트로 이어져 전통이 깊다. 이 전통을 기반으로 촘스키는 승승장구했다. 1세대 인지과학자들은 이 언어학을 토대로 접근했고 실패했다. 세상의 언어가 보편적이라는 시작 자체가 틀렸던 것이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사람의 언어는 아프리카 어떤 여성의 말에서 언어가 시작되었고, 그 비밀의 열쇠는 미토콘드리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허허 이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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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발달하면서 2세대 인지학이 등장했다. 이들은 촘스키의 보편언어학을 부정했다. 새로운 언어학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언어학이다. 그리고 이 언어학을 토대로 신경언어학을 구축했고, 언어에 기반한 뇌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지금 현재 가장 아방가르드한 최신의 언어학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도 또한 실패하리라 본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데 언어는 수학이 아니며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 이유는 언어는 각자의 경험이 신경패턴으로 구성되고 그 패턴이 소리로 나온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아니 인류문명을 통틀어 신경패턴이 보편적으로 같은 사람은 단연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를 전제로 하고 언어의 보편성을 고민해야 올바른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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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소통된다. 그래서 언어의 일부는 보편적이고, 일부는 개별적이다. 개별적인 생각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은유되어 언어가 소통된다. 가령 "내 인생은 마라톤 같아"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인생'은 이해못하지만 '마라톤'은 이해한다. 왜냐면 자기도 마라톤을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 이것이 은유언어학이다. 이 은유는 경험적 신경패턴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은유언어학은 신경언어학과 만난다. 사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신경언어학은 비트겐슈타인을 계승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고 그 게임은 유사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고 말했다. 언어게임의 룰은 제각각이다. 이 룰을 찾는 것이 어법(혹은 문법)인데, 진짜 문제는 이 어법적 기반이 아주 빈약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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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문법의 빈약성을 최봉영 샘 때문에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작년 초기에 공허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거나, <몸의 철학>을 읽지 못했거나, 아니 이 책을 이해하기 못했다면 나는 최봉영 샘에게 다가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봉영 샘은 나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주셨다. 왜 기존 문법이 빈약할 수 밖에 없는지. 최봉영 샘은 일본식 한국문법을 부정하셨다. 나아가 영국식 일본문법도 부정하셨다. 서양말과 일본말, 한국말은 굴절어와 교착어로 구분될 정도로 이미 그 구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같은 형식적 법칙에 구겨 넣을 수 없다고 말하셨다. 그럼 당연히 이런 대화가 따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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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교착어만의 새로운 문법이 있나요?"

"그럼 있지"

"어디요?"

"내가 만들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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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디자인아카데미에 선생님 강연을 열었다. 고백하건데 내가 너무 궁금해서 연 강연이다. 강연이 너무 흥미로와 아예 강좌를 만들었다. 내가 너무 공부하고 싶어 만든 강좌다. 나는 이 강좌를 들으며 열심히 정리했다. 정말 몇달동안 독하게 한듯 싶다. 강의 후기를 쓰면서 과거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하려고 노력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싶었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으니까.(https://brunch.co.kr/magazine/korean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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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는 아니지만, 선생님은 이미 대강의 교착어 어법을 구축하셨다. 선생님과 나는 이 교착어 어법과 기존 굴절어 어법을 비교하면서 서양언어학자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이 한국말을 특수한 대상으로 놓고 공부하는 태도를 지적하셨는데 완전 오해다. 나는 한국말을 알아야만 이와 비교해 서양말과 중국 한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한국말을 모른다면, 그건 바로 환원주의 직행이다. 과거 조선이 빠졌던 중국한자 환원주의, 현대 일본과 한국이 빠진 서양말 환원주의. 이 환원주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유일한 밧줄은 한국말이다. 다행이 이 밧줄은 우리의 탯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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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디자이너가 '디자인'이란 말을 모른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니 디자이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역사가들도 '역사'가 무엇이지 모르고, 정치가들도 '정치'가 무엇이지 모른다. 누군가 강하게 묻고 따지지 않아 아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열심히 읽다보니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래도 경제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솔직한 편이다. "자본주의요? 아휴 그걸 어떻게 대답해요!?" "과학 개념이요? 아휴 그건 과학철학자 분들이 하는거죠!" 솔직한 경제학자와 과학자들의 대답이요 태도다. 나는 이분들에게 감명을 받아 누군가 디자인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말하긴 창피한데... 뭐라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답한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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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식이다. 다행히 나는 '디자인'이란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방랑했다. 덕분에 내 분야와 다른 분야를 빗댈 수 있었고, 어떤 함정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랑은 외롭고 고독하다. 방랑에 지친 어느날 주저앉았고, 그때 우연히 <몸의 철학>을 선물처럼 읽었고, 마침 최봉영 샘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연의 일치며 행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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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는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다고 본다. 내가 쓴 책 제목 '역사는 디자인된다'는 비록 편집자가 지어줬지만 그분은 내 책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나는 제목을 곱씹으며, 아 이 제목이 근대인의 태도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내 책 전체를 디자이너의 시선에서 본 역사철학 책으로 재구성했다. 퇴고를 마치고 원고를 넘기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어떤 디자이너가 우리 분야에 역사철학을 고민한 사람이 있을까?라고 찾을때... 내 책을 읽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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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역사철학 관점은 미래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이다. 그러려면 패턴을 알아야 한다. 그럼 무엇의 패턴을 알면 미래역사를 디자인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을 최봉영 샘이 주셨다. "한국말을 알면 돼! 그럼 한국사람이 어떻게 생각했고, 생각하고 있으며, 생각할지 알 수 있어" 그렇다. "서양사람들, 중국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이 찬란한 문명을 구축하고, 문화를 이어오지 않았던가! 우리도 못할 것이 없지! 게다가 말과 글의 형식도 다르잖아. 그들에게 인도유럽피언 말과 알파벳이 있고, 중국말과 한자가 있다면 우리에겐 한국말과 한글이 있잖아. 만약 한국과 일본 사람이 손잡고 교착어인 한국말과 새로운 문자매체인 한글을 제대로 소개한다면 서양사람들과 중국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텐데... 왜냐면 비교할 대상이 생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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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대 철학흐름은 언어학, 인류학, 신경학, IT기술의 융합에 초점을 맞춘다. 최근에 읽은 인류학 책 에두아르드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퍼스의 언어학에 기반한 책이다. 그는 아마존 숲에 살아가는 동물과 사람들의 언어 현상을 현대인의 언어를 빗댄다. 이를 통해 현대 서양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나아가 어떤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만약 콘과 같은 인류학자들이 한국말의 새로운 현상을 알았다면 굳이 아마존까지 가지 않고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을텐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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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한국사람만의 것이 아니듯, 한국말도 한국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요즘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 한국사람이란 무엇인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한국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한국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 순간 한국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사람이 이태원에 놀러가 미국식 영어로 말하면 그 순간 그는 미국사람이 된다. 즉 그 어떤 말이든 말하는 사람이 주인이지, 따로 민족이나 영토에 그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넌 영국사람이니까 한국말하면 안돼?" 우리는 무의식중에 드는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즉 한국말과 한글은 한국사람의 자산이 아니라 인류문명의 자산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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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봉영 샘이 어떤 측면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은 시대의 자식이다. 최봉영 샘이 살아온 배경과 흔적 탓에 어떤 점은 낡아 보일 수 있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런대로 이해하면 된다. 최봉영 샘은 한국말이 금광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최봉영 샘이 그 자체로 금광이라는 생각이다. 최봉영 금광을 깨는 방법은 간단하다. 계속 묻고 따지고 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최봉영 샘의 생각을 듣고 읽고, 계속 생각을 이어갈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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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묻따풀학당을 만들었다. 이 학당을 운영하는 분들은 학당을 무료로 개방하는데 동의했다. 금광이 무료로 개방된 것이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선생님과 함께 학당에 오는 분들을 만나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할 필요가 없다. 꿋꿋히 나아가는 것이 진정 군자의 도리라 배우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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