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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12. 2017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인과률을 중심으로 

얼마전 후배가 대뜸 '포스트모더니즘'이 뭐냐고 질문해왔다. 나름 구조니 기호니 어쩌구저쩌구 설명을 했는데 영 찜찜했다.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하지 못하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는 자체가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의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도 확실히는 잘 모르고..."를 반복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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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어떤 책에서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 방법인 변증법을 뒤집고, 그 대신 과학적인 방법론을 정교하게 다듬었다"라는 대목을 읽다가 어떤 느낌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그의 변증법이나 논리학은 '원인'을 찾는다. 그 원인에 어떤 목적적 결과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참나무 씨앗이 참나무가 되듯이.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목적(telos)에 부합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신이라 상정했다. 철학에서는 이를 부동의 원동자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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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접근 방법은 유럽과 이슬람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종교적 철학 원리로 가져왔다. 죽음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원인으로 신을 합리화시켰다. 그렇게 철학과 신학은 한몸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개인의 믿음이 중시되고, 자유로운 사유가 장려되자, 새로운 탐구 방법이 등장했다. 하나는 베이컨의 '실험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의 '분석'이다. 통제된 상태를 통해 검증하는 기법을 고안한 베이컨도 훌륭하지만, 데카르트의 분석은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분석의 방법으로 대수와 기하학을 합친 대수기하학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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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본질은 수량화이다. 수량화를 이미지로 표현하면 기하학이 된다. 이 원리를 데카르트는 체계화 시켰다. 점점 사람들은 기도보다는 분석이 더 유용하고 합리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수기하학은 현상을 잘 설명했고, 심지어 (통제된 상태라면)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이 예측은 수학적 지표와 기하학적 모형으로 제시되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믿음은 철학+신학에서 과학으로 대체되었고 과학은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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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는 신이 없다. 있다면 '방법' 그 자체가 신이다. 공교롭게도 데카르트의 고전도 <방법서설>이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고안한 과학적 방법론의 세계에 산다. 우리는 이를 기계론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지지기반은 바로 '인과률'이다. 인과률은 원인과 결과를 촘촘하게 연결하는 방식이다.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모든 현상에는 그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는 또다른 원인이.... 계속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상호적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우리 세계가 구조적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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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시작해 수백년간 촘촘하게 다져진 인과율은 현대의 세계관이 되었고, 현재의 인식론이다. 물론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흄은 인과률은 단지 유사함이나 인접성 때문에 느끼는 착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니가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원래 그런게 아니란 말이다. 칸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칸트도 이를 논파하지는 못했고, 판단력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흄이건 칸트건 상관없이 여전히 데카르트의 기계론, 인과론을 신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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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부터 다시 새롭게 인과률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구조'를 다시 점검해보자는 후기 구조주의,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들은 '인과관계가 정말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보를 추적하다가 알게 되었다. 인과관계는 허상이라는 것을,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복합적이어서 특정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선형적 인과관계가 아닌 촘촘한 그물로 만들어진 인과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해석과 결과에 대한 존중이 생기기 되었다. 그래서 지역주의에 대한 존중, 문명의 다양성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탈영토니, 탈주니 하는 '탈'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지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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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은 인과률을 벗어날수 없다. 선형적 인과률이 비판받으면 다시 느슨한 인과론, 앞서 언급한 '씨앗과 참나무'처럼 원인과 결과를 묻고 그 과정의 인과는 얼버무리는 인과론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초의 원인, 최고의 원인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형적 인과관계와 그물같은 인과관계 사이, 이것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흐르는 강이 아닐까 싶다. 이 강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늘 그렇듯 강을 건너면 망각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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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에 이르러 사람들의 세계관은 기계론적 인과론에서 멀어졌다. 이 틈을 비집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변증론이 아닌 종교의 명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인간의 합리성을 대체할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인간은 다시 자신의 본래의 목적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즉 인간에 대한 관점이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회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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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난 다시 후배에게 포스트모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결과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선형적 인과률이 아닌 촘촘한 그물같은 인과관계로 인식이 바뀐 현상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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