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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14. 2017

교육과 공동체

현대는 어린이 사회다. 남보다 자기가 먼저이고, 타자보다는 타아가 중요한 거울 사회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사는 소사이어티(사회)다. 현대 개인주의는 이상적으로 성숙한 개인이 아닌 미성숙한 개인을 장려한다. 현대 자유주의는 책임있는 자유가 아닌 방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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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어리석은 이'의 줄임말이다. 남보다 자신을 우선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만 하고,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오래 참지 못한다. 긴 문장을 못 읽고 긴 토론을 못 견디며 문해력이 떨어지고, 깊이보다는 가벼움에 익숙하다. 복잡한 내용보다는 단순 명료한 이미지와 영상에 익숙해 애니메이션과 영화 등 동영상을 즐긴다. 귀여움과 자극적인 폭력, 단순한 리듬과 혼란스런 불협화음, 감정의 극단과 극단을 오간다. 고귀한 중용은 물론이요, 온건한 중간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른스런 태도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아니 존재감 자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현대는 어른이 사라지는 사회, 어른 없는 어린이 평등 사회라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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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린이들 사회에서 품격있는 소통, 성숙한 공동체를 바라는 것 또한 어리석다. 문제를 제기하는 뉴스는 쇼가 되었다. 멋진 진행자와 음악이 흐르는 매체들이 뉴스를 장악한지 오래다. 오랜 영향력을 발휘한 신문은 본연의 역할을 망각한 채 잡스런 소식을 잡스럽게 담은 잡지를 지향한다. 이미 뉴스의사실 여부를 다투느랴 문제 자체가 방기된지 오래다. 프레임이 패러다임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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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비니지스로 점철된 정치 시스템은 시간때우기와 가림막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그럼에도 모든 공적인 시스템은 서로를 벤치마킹하며 쇼비지니스화 되고 있다. 쇼로 문제를 덮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위험에 처한 꿩이 머리를 박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시민'이요, 무슨 민주주의인가. 게다가 선거가 쇼가 된 대의제 민주주의는 그저 귀족 공화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양극화는 희망적 표현이다. 절망적 계급사회라 해도 무방하다. 어쩌면 좋은가... 차라리 지금은 역할을 극단적으로 분리하자던 플라톤의 극약처방이 적합할지도 모른다. 각 시스템의 좋은 점을 혼합하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적 처방은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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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어린이가 되는 사회의 가장 큰 처방은 역시 교육이다. 경제나 정치이념이 문제가 아니다. "바보야, 문제는 교육이야"라고 크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교육은 일종의 소통이다. 커뮤니티는 소통에 의해 구성된 임시적 공동체다. 왜 소통할까?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알고 싶어서다. 상호간 배움을 통해 잠시나마 모이는 것이다. 만약 휼륭한 어른, 스승이 있다면 그 모임은 더욱 오래간다. 어른이 모범을 보이고 어린이는 그 어른처럼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정치로 환원하면 어른 없은 소통은 민주주의요, 어른있는 소통은 공화정이다. 아무튼 어쨌든 수평이든 수직이든 인간은 서로 배우기 위해 모인다. 즉 인류의 정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학습공동체요, 교육과정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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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든 성숙이든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존중되고, 모두가 어린이가 되려는 마당에 공부니 학습이니 교육이니 무슨 소용인가. 어른이 있어야 어린이도 존재하는 것이데, 어른조차 어린이처럼 행동하는 마당에서 누가 공부를 하려하겠나. 굳이 공부를 안해도 이미 정보는 과잉이고,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굳이 그걸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나. 교육 자체가 필요없다. 결국 근본에서 무너진 교육이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아니 공동체 자체를 와해시키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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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목표가 있으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모인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위계 구조가 있어야 성립가능한 문제다. 그렇게 임시적 소통(커뮤니티)이 시작되고, 부대끼는 와중에 공통의 경험이 생기고 추억이 축척되어야 끈끈한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래야 공감과 공존, 공생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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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백년의 계획(백년지계)이다. 백년동안 쓸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닌 백년동안 공동체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이제 2500년 중국문명이라는 거대 공동체의 초석을 놓은 논어의 첫 구절을 상기해 보자. "배우고 시의적절하게 익히면 얼마나 기쁜가.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함께 공부하면 얼마나 즐거운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아야 진정 군자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은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모름을 인정하면 계속 배움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래야 서로 계속 소통하는 커뮤니티+공동체가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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