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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19. 2017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때문에 '자유'는 우리 삶에서 강력한 가치 기준이다. 그럼 '자유'란 뭘까? 이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제로섬 게임이라 누군가가 많은 자유를 누리면 상대방은 그만큼 부자유가 늘어난다. 이 딜레마로 감정이 상하고, 소외가 생기고, 질투가 싹튼다. 때론 폭력을 유발한다. 그래서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평등'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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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평등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서로 자유를 적절하게 나누자"라고 타협한다. 이 타협이 바로 그 유명한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에 의한 불평등 해소는 반드시 자유를 억압한다. 고귀하게 말하면 자제를 요구하고, 천박하게는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평등한 자유는 무늬만 자유다. 복잡한 인간의 삶에서 사회계약은 일일히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류가 많지만... 크게 압축하면 '자유와 평등의 균형잡기'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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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에서 이률배반적인 자유와 평등은 선택이 아니라 조화의 문제다. 모두가 만족하는 적절한 계약을 해야한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날수록 그런 계약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유'라는 문제는 미묘한 복잡성을 갖게 되었다. 뭔가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자유의 개념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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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기준은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는 양심이다. 개인이 등장하고 각 개인이 모두 중요해지자 자유는 '우리'에서 다시 '개인'의 책임으로 돌와왔다. 즉 자유가 개인의 양심문제가 된 것이다. 자신의 양심에 물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 자유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 때문에 그것을 못하게 된다면, 만약 그런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둘 모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지만 후자의 경우 찝찝함은 행동의 결과와 상관없이 늘 따라다닌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을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 말한다. 이런 중용에는 '인의예지'가 있고, '용기'와 '절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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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하고 싶은 것을 할수 있는데 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을 황금률 세미나 뒷풀이에서 알게 되었다. 이성민 선생님은 기타 연주로 예시를 들었는데. 가령 누군가 기타를 너무 치고 싶은데 기타가 없는 상황이라면 자유롭지 못하다. 기타를 너무 치고 싶어 알바를 해서 구입했는데... 막상 기타를 손에 쥐니 연주를 할 수가 없다. 코드를 잡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고 싶지만 역량이 없어 못하는 상황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 '역량'이 자유의 두번째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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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예를 더 들면,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인정받는다. 반면 일을 잘 못하면 여기저기서 눈치를 받는다. 전자는 후자보다 자유롭다고 느낀다. 즉 일을 잘하고 성과가 좋다면 그 사람은 회사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역량이 자유를 가져다준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농땡이를 치다가 우연히 성과가 난 경우라면, 그것을 그 자신이 알고 있다면 어떨까... 만약 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량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충돌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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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아주 복잡하다. 양심과 역량이 모두 만족되는 자유를 누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또한 모두 불만족한 자유도 흔치 않다. 둘이 몇대 몇으로 혼합되어야 자유과 평등의 사회계약에 부합되는지 정해져 있지도 않다. 사회계약은 그저 '룰' 정도와 결과에 대한 잘잘못을 가릴 뿐이다. 결국 다사다난한 삶에서 자유의 문제는 우리 개인의 책임에 맡겨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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