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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러 생각

문명의 범주

by 윤여경

며칠전 김유익 샘이 나의 공부가 문명의 탐구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셨고, 어제 최봉영 샘이 문명의 범주 구분을 분명히 해주신 덕분에 문명에 대한 나름의 판단 기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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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주로 지리나 정치에 따라 문명을 구분해왔다. 이를 지리학, 지정학이라 말한다. 지정학은 지리와 정치를 합친 말로 지리적 위치에 따라 정치와 국제관계가 변화가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페르낭 브로델은 <지중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는데, 그는 문명의 장기지속적 측면이 지리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새뮤엘 헌팅턴이나 데이비드 하비와 같은 학자들은 모두 지리와 정치가 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지리학'을 문명과 문화의 큰 바탕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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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년전 초원의 역사를 읽으며 이들의 주장이 몇몇 문명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흥미롭게도 초원의 역사는 지리와 상관이 없다. 그들은 엄청난 이동을 하며 살았고 이들의 이동은 다른 문명들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아마 알려진 영향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지리'와 '정치'는 문명에 있어 국소적 기준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기준이 딱 맞는 경우라해도 문명의 주인공이 '사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문명의 주인공을 '지구'로 놓으면 괜찮지만 문명의 주인공을 '사람'으로 놓으면 아무래도 '지리'는 문명의 범주 구분에 적합한 기준은 아닐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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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최봉영 샘이 문명의 3가지 기준을 말씀하셨다. 첫째는 말, 둘째는 글, 셋째는 도구다. 나는 이 기준을 읽고 무릎을 딱 쳤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문명과 문화를 묻고 따지고 풀어왔지만 이렇게 또렷하고 뚜렷한 기준을 잡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나는 한국말에 눈을 뜨면서 동시에 한국사람의 문명과 문화, 생활 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관점의 책과 글을 읽으며 한국에 대해 살펴왔지만 한국말처럼 또렷하게 한국을 설명하는 경우가 없었다. 때문에 '말'이 문화와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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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 3가지 기준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가장 작은 단위의 문명 기준이다. 그리고 '글'은 중간단위의 문명 기준이고, '도구'는 가장 큰 단위의 문명 기준이 된다. 예를 들면 한국문명은 '말'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동아시아 문명은 한자라는 '글'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유라시아 문명은 바퀴나 철 등 '도구'를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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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된 접근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가령 '한국문명'을 알기 위해서 한자와 같은 '글'을 살피는 경우가 있다. 이건 잘못된 접근이다. '글'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도 쓴 문자이기에 '글'로서는 한국만의 문명을 파악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도구'와 '기술'도 잘못된 접근이다. 기술사를 읽으면 '도구'의 시공간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누가 발명했는지, 그 연대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록?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한번 읽어보라.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이 많은지... 이 책에서 블로크는 역사적 기록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고충을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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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명을 알려면 '라틴말'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 문명을 알려면 '그리스말'을 알아야 한다. 여진족의 만주문명은 그 존재가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만주말'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명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동아시아 문명의 실체인 '한자=글'을 통해 만주문명의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즉 '말'이 사라지면 가장 최소 단위의 문명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반면 로마말과 그리스말은 서양의 여러말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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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말'은 문명의 최소단위 기준이다. '글'은 중간, '도구'는 큰 단위의 문명 기준이다. 이 기준을 알고 있으면 문명을 어떻게 접근하고 공부해야하는지 명확해진다. '한국문명'과 '한국문화'를 알려면 일단 '한국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글'을 통해 한국문명이 동아시아 문명에서 어떤 맥락에 놓였는지 파악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도구'를 통해 한국문명이 유라시아 문명에서 어떤 맥락에 놓였는지 파악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지리'과 '정치'를 살피며 이 맥락들이 어떤 자연환경 속에서 어떤 사건을 낳았는지, 자신들의 처한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 갔는지 파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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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공부에 있어 이 순서는 아주 중요하다. 만약 '한국말'을 모른채 나머지들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한국문명은 그 존재조차 부정되고 동아시아나 유라시아에 바로 편입되어 버린다. 혹은 지리와 정치적 사건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즉 문명의 주체성을 상실한채 정체성 속에서 허우적대다 결국 자신의 본모습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 사라진 문명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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