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놀이를 강조하면서 정작 놀이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과거 나는 하우징아의 책을 읽으며 놀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하우징아의 책 <호모 루덴스>를 읽으면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강조되지만 정작 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놀이는 단순히 재미난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 그 자체임을 강조할 뿐이다. 나는 하우징아를 통해 놀이와 문화의 관계를 깨달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늘 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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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는 최봉영 선생님의 <주체와 욕망>을 읽으며 비로소 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한 대상의 길이가 긴지 짧은지 알려면 비교하는 대상에 비춰보아야 하듯이, 말의 개념을 알려면 비교되는 말이 있어야 한다. 최봉영 선생님은 '놀이'와 비교되는 말로 '장난'과 '일'을 꼽는다. '장난'과 '놀이'는 모두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려는 태도다. 반면 '일'은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 '장난'과 '놀이'의 차이는 '규칙'이다. '장난'은 규칙이 없어도 되지만, '놀이'는 '일'처럼 반드시 규칙이 있어야 한다. 정리하면 '놀이'는 '장난'처럼 과정을 즐기는 태도이면서 동시에 '일'처럼 공공적 규칙을 갖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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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봉영 선생님을 통해 '장난' '놀이' '일'의 개념을 알게 되었고, 이 개념을 부산의 한 지역 브랜딩 프로젝트에 적용했다. 지금까지 뜬금없는 '장난'이나 딱딱한 '일'처럼 진행되어 왔던 지역 브랜딩을 '놀이'로서 접근했다. 이 접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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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나는 사람이 두개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세계는 '마음'과 '몸'이다. 마음의 세계는 생명체 각자의 안에 있고, 몸의 세계는 생명체 바깥에 연결되어 있다. 어렵게 말하면 주관의 세계와 객관의 세계이고, 쉽게 말하면 안과 밖의 관계다. 최봉영 샘은 이 두 세계가 머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고, 이 머리는 '말(언어)'라고 하셨다. 즉 마음의 세계와 몸의 세계는 '말'로서 연결된다는 의미다. 나는 오랜시간 '사람이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고 따져왔지만 '마음-(머리=말)-몸'의 도식이야말로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최고의 통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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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도식을 '놀이'에 적용해보자. '놀이'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활동이다. 그래서 '놀이'를 하면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요시여긴다. 즉 몸이 연결되어 있는 세계가 중요하다. 그래서 '놀이'를 하려면 마음의 세계는 제멋대로 하지 못한다. 반드시 몸의 세계가 연결된 공공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만약 마음의 세계가 몸의 세계 규칙을 무시하게 되면 '놀이'는 바로 '장난'으로 전환된다. 규칙을 무시하고 장난을 하면 함께 놀이하던 사람에게 핀잔을 듣는다. "자꾸 니 맘대로 장난치면 난 안할래"... '놀이'가 마음의 세계가 몸의 세계에 종속된 상태라면 '장난'은 몸의 세계가 마음의 세계에 종속된 상태이다. 각자 마음의 세계는 공공적 규칙이 없기에 '장난'에는 규칙이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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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인이 '자유'에 대해 착각하는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난으로서의 자유'와 '놀이로서의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마음의 세계와 몸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말하려면 반드시 두 세계를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 가령 칸트가 말한 '자유'는 "몸의 세계에서 깨닫고 익힌 자유를 네 마음에 배이게 하라"는 의미다. 이걸 '정언명령'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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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이 실현된 상태가 바로 '일'이다. '일'은 자유의 최고 단계다. 사람은 서로 일을 해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의 세계와 몸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경험한다는 의미다. 내 마음의 줏대와 공공(몸)의 잣대가 잘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결과가 좋다. 때론 일이 놀이처럼 과정 자체가 즐겁기까지 하다. 반면 마음의 줏대와 몸의 잣대가 잘 맞지 않으면 결과가 좋더라도 과정이 힘겹다. 그래서 '정언명령'은 단순히 착하냐 아니냐의 도덕률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을 함께 함에 있어 사람됨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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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문화'에 크게 기여하지만 '놀이'가 그 자체로 문화는 아니다. 놀이가 문화의 전부는 아니란 오해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에는 '놀이'만이 아니라 '장난'도 있고, '일'도 있다. 그리고 이 구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정과 결과, 규칙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사람의 마음과 몸, 그리고 머리(말)의 매개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놀이'와 문화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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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우징아의 책을 덮을 때를 정확히 기억한다. 소파에 앉아 한두시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이유는 도무지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서양 중세를 공부하면서 그의 유명한 책 <중세의 가을>을 읽고나서야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중세를 설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놀이'를 가져왔고, 그 '놀이'를 전체 문화로 확대했던 것이다. <중세의 가을>은 문장이 수려하면서 아주 탁월한 책이다. 또한 서양 중세에 대한 눈을 새롭게 뜨게 해준다. 다만 중세를 '놀이'로 규정하고 그 규정이 사람의 전체 '문화'로 확대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도 멍했던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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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글쓰기를 자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이 '놀이'에 대해 너무나 모호하게 이해하거나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이들은 적어도 '놀이'를 단순히 '문화'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장난'과 '일' 그리고 '자유'와 함께 생각해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