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지난주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작성된 학생의 에세이이다. 강의 내용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렇게 정리된 글을 읽으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아! 우리가 서로 통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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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 등장하는 '요소결합체'라는 용어는 최봉영 샘의 <주체와 욕망>에 나오는 개념어이다. 샘은 요소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상태를 '요소결합체'라고 보고, 전체를 요소로 분리할 수 없는 상태를 '속성통합체'로 구분했다. 이를 좀더 흔한 개념어로 바꾸면 '기계론적 세계관'과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사람을 '요소결합체'로 보았고, 스피노자는 사람을 '속성통합체'로 보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몸을 '기계'로 묘사했고, 스피노자는 감정을 '속성(속)->양태(겉)'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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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대상을 어떻게 보냐에 따라 철학과 과학의 태도가 달라진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동양의 미술은 대체로 대상을 '속성통합체'로 보고, 서양의 미술은 대체로 '요소결합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요소결합체적 태도가 추상적 요소를 만나 거대한 전환을 이룬 현상이 바로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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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을 이해하기까지 약 10여년이 걸렸다. 나의 이해는 어디서 읽은 것을 인용하기 보다는 다양한 학문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스스로 깨달은 것에 가깝다. 과정은 '요소결합체'적이고 결과는 '속성통합체'적인 그런 느낌. 그래픽디자이너가 디자인 하듯 구성한 이론이랄까. 아무튼 나의 이론 자체가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않은 것이기에 학생들에게 늘 당부한다. "내 말 너무 믿지 마세요!" 그럼에도 이처럼 열심히 듣고 정리해주는 학생이 있어 늘 고맙다. 이분은 아직 학기 초반이지만 이미 깊은 이해에 들어섰다. 이런 분들 덕분에 공부와 강의를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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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과 디자인의 갈림길>
생각은 취향을 만들고 취향은 태도를 만들며 태도는 방법론을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술과 디자인은 시각요소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은 기원전부터 존재한 인류 최초의 매체이며 디자인은 미술에서 파생된 근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미술사에서 디자인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미술이 감각 모방과 지각 재현, 생각 편집의 단계를 거치며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디자인은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추상요소는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이자 미술과 디자인을 가르는 기준이다.
18세기까지 현실 재현을 과업으로 삼았던 미술은 19세기 초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했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보다 정확하고 사람의 손보다 빠르게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진은 무한정 복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효율성과 정확성의 측면에서 그림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예술가들은 감각 모방의 역할을 사진에 넘겨주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전통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현실 요소들을 주관적인 지각으로 재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개인의 자유와 감각의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추상’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추상요소의 발견은 기존 예술의 종말과 새로운 예술의 시작이었다. 당시 주목받았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은 새로운 예술/디자인의 기반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였던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꿈의 해석>에서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이 지배한다’고 주장하며 개인과 무의식의 세계에 주목했다. 반면에 독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공산주의의 창시자였던 마르크스(Marx, K., 1818-1883)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외치며 집단과 노동의 가치를 강조했다.
대조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미술계는 두 갈래로 분파되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미래파와 초현실주의-‘예술을 위한 예술’(미술)-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구성주의와 바우하우스-‘대중을 위한 예술’(디자인)-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미술과 디자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미술은 주관적인 표현 방식으로 대중과 거리가 멀어졌으며 작품 해석을 위한 평론을 필요로 했다. 점차 소수의 고급 대중과 예술가, 평론가들의 영역으로 국한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이러한 엘리트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한편, 현대미술의 혁명가로 불리는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전통 예술을 전면 부정했는데, 이러한 비판적인 태도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즉 전위예술로 발전해 나갔다.
미술과 디자인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분리되었으나 사람을 몸과 마음의 요소결합체로 보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통 근거로 삼고 있다. 추상을 통해 생각과 편집(design)으로 욕망(desire)을 재구성한다는 면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예술에서 생각이란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규칙이 가장 잘 반영된 분야는 언어이며 미술/디자인은 그림 언어를 발명하여 하나의 분야로 인정받았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시각예술의 범주에서 ‘언어 생산자’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술과 디자인은 사람의 몸과 마음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속성통합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