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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29. 2017

대학교육에 대한 단상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355


"생각해 보면 인문학은 그 정체가 '비학제적 학제' 또는 '비제도적인 제도'라는 역설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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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떠오르는 생각은 많은데... 도무지 정리가 안된다. 일단 생각나는대로 적어내려가보자. 대학은 현재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같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축소도 크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업화의 실패'가 아닐까 싶다. 기업의 후원이 끊어지자, 스스로 기업이 되고자 했던 대학은 도리어 교수와 학생이라는 자신이 가진 최대의 자원을 상실하고 있다. 학문의 백화점이 되고자 했기에 교수는 영업사원이, 학생은 고객이 되었다.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본래 학문이라는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학생은 물건을 사러온 고객이 아니라 교수 옆에서 돕는 도제이다. 생산공장이 되어야 할 대학이 시장을 지향하면서 대학은 방향을 상실했다. 이런 접근이 대학이 본질을 상실한 원인이며, 기업화가 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실상 기업은 가치를 생산하는 곳이지, 가치를 파는 곳이 아니다. 즉 현재 대학의 기업화란 생산기지가 아닌 유통기업, 백화점=시장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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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인문학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인문학을 배우기 어렵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배운 경험이 없으니, 그 시스템은 잘 모르겠지만, 나름 10년간 독학을 하면서 체득한 인문학은 "닥치는대로 읽고 쓰고의 반복"이다. 위 인용구처럼 '비학제적 학제' '비제도적 제도'가 적절한 표현인듯 싶다. 그런데 대학은 학제와 제도가 너무 선명하다. 경계가 도리어 공부의 장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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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문제를 통찰하는데 상당히 유리하다. 흔한 표현처럼 '지혜로워'진다. 복잡하고 혼란스런 사회일수록, 특히 현대처럼 정보가 과잉일수록 인문학의 유용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현재의 인문교육 상황은 이런 장점을 발휘하기 보다는 '밥상+밥그릇'이라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있다. 20세기 초 '예술을 위한 예술'이 그랬듯,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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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것은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현대 인문학은 역사와 철학, 문학, 정치, 경제, 사회, 과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분야들을 모두 공부하려면 미쳐버린다. 그런데 고전에는 다양한 분야가 무차별적으로 섞여있다. 아니 잘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고전 공부는 효율적이다. 많은 자유인문과정이 고전을 채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류 보편의 '깊은 통찰'의 사례를 직접 살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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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무적 전공에 반드시 인문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속은 디자인 전공에서는 어떤 인문학을 배워야 효율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일단 꺼내든 카드는 '미술사+세계사+기술사'이다. 쉽게 말해 역사의 맥락속에서 미술과 기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미술사를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사는 진짜 미술이다. 그 전의 미술사는 디자인사의 고전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고할만한 자료가 별로없다. 대부분의 미술사가 중세까지는 짧게 퉁치고, 르네상스부터 힘을 주기 시작한다. 안타깝다. 난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은 디자인 공부에 별로 유익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리스도 바우하우스도 모두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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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학으로 돌아오면, 내가 보기에 대학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시간이다. 바로 4년이라는 시간. 이 시간이 모든 전공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왜 굳이 4년일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4년이라는 학제 표준화를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미 건축대학은 5년제가 되지 않았나... 어떤 전공은 시간을 줄이고, 어떤 전공은 더 길게 늘리면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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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석박사는 통합하는게 좋을듯 싶다. 석사 스팩이 별반 의미없는 상황에서 둘을 가르는건 제도적으로 비효율적이다. 또한 가르치는 것 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사실 시간강사의 시작은 석박사 과정생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관례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석박사는 배우는 과정이자 가르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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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전공개념을 무너뜨리고, 학부제, 자유교양제, 평생교육제 등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인문학 공부와도 연결되는데...이 말은 대학이 너무 전공의 전문성 자체에 몰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11세기 볼로냐 대학이 만들어 질때 첫 취지는 공부를 위한 기본 소양의 확립이었다. 3학4과로 알려진 중세의 학제를 보면, 3학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으로 쉽게 말해 '읽고 쓰기'다. 이런 기초를 확립하고 나야 4과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같은 전문 과정을 배웠다. 난 우리 시대의 대학이 이런 본연의 기본 과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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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텔레비전과 컴퓨터로 대변되는 이미지 시대다. 인쇄시대의 문해력이 급격히 상실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점점 단순화 되고 있다. 전형적인 중세 초기 현상이다. 기사에서도 일본의 사례를 통해 잠깐 언급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시급한 것은 현명한 엘리트의 양성이다. 문제는 어떤 엘리트이냐이다. 근현대의 전문가인가, 고대의 현자인가... 나는 이미 전문영역은 컴퓨터라는 영역에 깊게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현자이다. 우리 사회에는 경제, 정치,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문제를 통찰하고, 방향을 제시할 현자가 절실하다. 그래야 혼돈이 다소 해소될 수 있다. 문제는 이들 현자가 컴퓨터를 장악해 전체주의 사회로 갈까 걱정인데... 이미 그런 흐름은 진행된듯 싶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장악한 자들이 공익을 걱정하는 대인(大人)이 아니라 삿된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인(小人)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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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대학은 일종의 공동체다. 사회는 개인을 전제한다. 즉 사회는 개인들이 경쟁하는 공간이다. 승부, 승자와 패자가 나눠지는 냉혹한 시스템이다. 개인은 이런 사회에 나오기 전에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혹은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는 협동하는 공간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동체는 가족이다. 그리고 학교다. 학교는 배움(學)과 교류(校)가 있는 곳이다. 경쟁하는 사회가 아닌 함께하는 공동체다. 본질적으로 사고파는 유통 플랫폼=기업화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대학은 이런 학교 본연의 모습으로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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