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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Dec 18. 2022

'가치 본질주의'와 '가치 구성주의'

나는 사람이 가치를 지향하는 과정을 '가치 본질주의'와 '가치 구성주의'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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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본질주의란 추구하는 가치에 근본적 '본질' 있다는 생각이다. 가령 의자의 가치를 떠올릴때 '앉는 부분 + 다리 4개'가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처럼. 이런 생각을 가진 집단이 가치를 추구할때면, 먼저 최상의 가치 본질을 찾으려 한다. 그런 가치가 정해지면 모든 사람은 그 가치에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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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가치 구성주의는 추구하는 가치에 근본적 '본질'이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의자의 가치는 '앉는다'는 속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나는 길에 있는 바위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그 바위도 의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구성주의적 의자는 특정 형태를 갖지 않고 언제든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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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구성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은 특정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각자의 가치를 상호 존중한다. "아하, 너는 그런 것을 하고 싶구나!"라며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런 사람들이 집단화되면 서로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그 가치들의 블록을 조립한다. 마치 레고블록을 쌓듯이. 쌓여지는 블록은 어떤 특정 모습을 염두하지 않는다. 쌓다보면 언젠가 어떤 모습을 띄게 되고, 그 모습이 우리들의 가치지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가치가 계속 쌓여가면서 가치의 모습이 계속 변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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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본질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은 단기적으로 빠르고 강하게 조직될 수 있다. 그만큼 성과도 빨리 난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한다. 세상이 바뀌면서 가치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치 구성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은 단기적으론 취약하지만 장기적으론 지속하는 힘이 강하다. 변화하는 가치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때론 이 집단이 가치를 진화시키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마치 100m 단거리와 마라톤 경기의 차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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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다른백년 송년회가 있었다. 오랜시간 시민운동을 하신 선생님들과 새롭게 시민운동을 하고자 하는 젋은 친구들이 마주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선생님들은 젊은 친구들과 만나 반가움의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과거와 요즘 사람들의 시민운동이 달라졌다는. 나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와 같은 생각을 했다. 과거 선배들과 선생님들은 '가치 본질주의'적 시민운동을 했다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가치 구성주의'적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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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순간은 다른백년을 만들고 오랜시간 이끌어오신 이래경 (전)이사장님이 나를 '윤선생'이라고 부른 것이다. 보통은 대부분 나를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어떤 유용한 전문인력으로서 나를 배려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에 가끔 불만이 있다. '디자이너'라는 강력한 말로 인해 오랜시간 쌓아온 나의 인문학적 바탕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란 특정 직업에 갇히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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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선생'이란 호칭은 참으로 묘한 말이다. 맥락에 따라 상대방을 폄하하는 표현이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그 맥락은 너무나 분명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차린다. 그 표현이 존중인지 아닌지. 이래경 이사장님이 나를 '윤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맥락상 확실한 존중의 표현이었다. 다른백년에 연재한 나의 칼럼을 읽으셨다며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즉 나의 디자이너적 속성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속성까지 고려한 호칭 선택이셨다. 그래서 내심 기뻤다. 올해 다른백년에 연재를 하면서 무척 힘들었는데 뭔가 인정받는 보람을 느끼는 뜻 깊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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