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박문호 박사님의 뇌과학 강의를 들으며 감각에서 불안까지의 거대한 맥락을 이해했다. 이 소중한 이해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사람은 감각을 한다. 감각 정보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오장육부 등 내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다. 이 정보들은 중추신경계인 뇌에 모인다. 최초의 감각 정보는 외부와 내부의 정보를 그대로 모방하지만, 뇌는 이 정보를 다시 분류해서 재가공한다. 이것이 바로 지각 정보다. 지각 정보는 거의 대부분 이미지 형태로 변환된다. 이 과정에 기억이 개입된다. 기억은 굉장한 매카니즘이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감각 정보가 기억을 통해 재가공된 지각 이미지는 일종의 느낌이다. 이 느낌은 감각이 지각을 통해 재현된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이 느낌을 '촉'이라고 말하는데, 이 느낌=촉은 사람의 판단과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바탕이다. 인지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촉)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해도 항상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한다는 것을 엘리엇(Ellitot)이라는 정신질환자의 임상경험을 통해 알아 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의 책 <데카르트의 오류>를 참고하면 좋다.
지각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는 생각을 통해 편집된다. 이 과정에서 '주관'이 형성된다. '주관'은 영어로 subjectivity인데, 나는 이 주관이 바로 문장의 '주어=subject'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한국말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최봉영 선생님은 subject의 한자 번역인 '주어'는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신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주어' 보다는 오히려 주가 되는 관점이란 의미의 '주관'이란 말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주관은 사람의 욕망을 구성한다. 이 욕망은 주로 지각 이미지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사람의 감각들은 지각에서 이미지 형태로 재현되고, 생각으로 편집되어 결국 욕망적 이미지로 재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인지과학과 인지언어학에 끌리고, 또 몰입해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이미지를 언어적으로 소통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이미지'는 아주 중요하다.
욕망으로 구성된 이미지는 목적을 내포하는 대상이다. 사람은 욕망이 있기에 '대상'을 가지게 된다. 이 대상을 영어로 하면 object이다. 대상=object는 문장에서 목적어이고, 철학과 예술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대상=object를 제대로 이해해야 언어와 철학,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 대상=object란 무엇일까?
대상(object)은 감각이 지각으로 재현된 이미지가 주관(subject)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이다. 한국말은 '나는 산이 보인다'와 '나는 산을 본다'를 구분한다. 동사의 형태에 따라 수동적인 경험과 능동적인 경험이 구분된다. '보인다'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과 지각 정보가 순수하게 경험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보이는 이미지'를 탐구해 <판단력 비판>을 저술했다. 그가 '보이는 정보'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을 통해 '보는 정보'를 깊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보는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후에 비로소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보이는 이미지'에 다소 둔감한 측면이 있다. 왜냐는 사람은 늘 주관을 통해 어떤 목적적 대상을 인식하고 그 대상을 통해 감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관적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정보들 중 특정 정보를 독립된 개체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미술 용어로 은유하면 '전경(이미지)'라 할 수 있다. 전경은 배경속에서 도드라진 이미지다. 전경 외에 나머지 배경은 모두 연결된 채로 흐릿하게 인식된다. 이 전경이 바로 '대상=object'이며 '목적어'이다. 영어에 index라는 표현이 있다. 한자어로는 '지표'라고 번역되는데, 그 이유는 index가 어떤 의미를 가르킨다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codex라는 표현이 중세시대 '책'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index의 의미를 다시 고민한 적이다. in은 안과 밖을 인식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밖에서 안으로 넣을때 쓰는 말이다. 문제는 dex인데, codex의 co가 모여있다는 의미에서 codex가 책을 의미한다면 dex라는 말은 '정보'를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index는 '정보를 안으로 넣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index라는 영어나 '지표'라는 한자어로는 어떤 말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보를 안으로 넣는다'처럼 맥락을 포함한 한국말 문장은 어떤 말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어쩌면 기호학을 정립한 퍼스가 index를 주목한 이유는 기호가 어떤 '독립된 개체=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독립된 개체를 인식한 사람은 이를 표현하고 소통하기를 시도한다. 최초의 표현은 아마 몸짓이었을 것이다. 꿀벌 등 여타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다 소리를 사용했을 것이다. 새처럼 소리를 내는 동물이 그러하듯이. 두손이 자유로웠던 사람은 자신의 몸짓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었다. 다만 신체와 도구의 한계로 모든 이미지를 그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적 이미지를 강조해서 표현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체와 소리의 한계로 모든 이미지를 소리로 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적 소리를 강조해서 표현했을 것이다. 나는 그림과 소리의 진화가 그림문자와 소리문자의 출현과 발명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림문자가 먼저 출현하고 소리문자가 형성되었다. 라스코 동굴 벽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이 있다. 어떤 것은 단순하게 어떤 것은 정밀 묘사로 그려져 있다. 나는 두 그림의 표현 차이를 주목했는데, 나는 이를 통해 언어의 법칙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시각언에 대한 책을 기술하면 그 법칙을 설명할 날이 올 것이다.
단순한 그림은 점점 그림문자로 체계화 되었다. 그림문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소리문자로 체계화 되었다. 이로서 사람은 그림과 소리를 모두 이미지로 표현할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몸짓과 음성, 문자를 통틀어 '상징(symbol)'이라고 말한다. 상징은 사람만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20세기 중반 독일 관념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캇시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상징'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주목한다. 그 책은 온통 인간의 다양한 '상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상징은 symbold의 한자 번역어이다. symbol은 sym과 bol의 합성이다. sym은 고대그리스어에서 온 접두사로 with란 뜻을 갖고 있다. bol은 개인적으로 bowl(그릇)의 축약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symbol은 어떤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경험 중 중요한 경험들은 어떤 이미지에 담겨 기억된다. 마치 뭔가를 그릇에 담아 놓듯이. 때문에 의미 기억에 '그릇' 은유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그림이나 소리에 어떤 경험을 담을때 모든 것을 다 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을 선별적으로 담는다. 가령 '코끼리'를 경험하면서 '코가 길다'라는 특징을 가장 중요하다고 선별한다. 그래서 코끼리 상징은 대게 코를 길게 강조한다. '코끼리'라는 단어도 '코'와 '길이'의 합성어에서 비롯되었다. 상징이 총체적 경험의 일부만을 반여하다보니 상징은 맥락(context)가 아주 중요하다. 맥락이 있어야만 상징이 의도하는 의미가 살아나는 경우가 많다.
상징적 맥락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소통이다. 개인은 어떤 경험을 표현할때 일부만을 차용하기 때문에 자신이 차용한 일부가 어떤 맥락속에 있는지를 기억한다. 덕분에 과거의 사진을 보면 그 사진과 연관된 기억들이 함께 떠오른다. 사진의 맥락적 의미가 구조적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상징 맥락은 사회적으로 소통됨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상징이 사회적으로 소통되려면 반드시 공공성을 획득해야 한다. 개인의 경험적 맥락만으로 형성된 상징은 오로지 개인적 의미를 갖고 있기에 사회적 소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상징 경험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국민대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는 김의래 교수는 이를 '이미지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상징은 상징끼리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 낸다. 언어 문장에서 단어들은 두가지 관계를 갖는다. 하나는 결합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계열관계다. 결합관계는 주어와 목적어, 동사 등 문장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는 단어들이 결합되어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이다. 계열관계는 반의어처럼 의미가 상호적으로 관련 있는 단어관계이다. 계열관계는 수평과 수직으로 나뉜다. 반의어와 유사어가 수평관계라면 수직관계는 범주별 층위로 구분된다. 하위층위범주-기본층위범주-상위층위범주. 기본층위범주는 대개 이미지가 바로 연상되는 단어들을 말한다. '코끼리'처럼. '코끼리'의 하위층위범주는 '아프리카 코끼리' '인도 코끼리'이다. 반면 상위층위범주는 '동물'이나 '생명체'이다. 하위층위로 갈수록 가르키는 대상이 분명해지고, 상위층위로 갈수록 가르키는 대상이 모호해진다.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까. 상징이 상위층위로 가려면 상징들의 공통점을 추출해야만 한다. '동물'이라는 상위층위범주의 말은 다양한 생명체 중 '움직인다'라는 개념적 특징들을 공유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은 다양한 상징들을 결합하여 무한대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의미도 만들수 있다. 우리는 '날아가는 코끼리'는 본적이 없지만 상징 결합으로 '날아가는 코끼리'를 그리거나 말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왜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우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움직이기 때문에 다음 움직임을 위한 예측이 필요하다. 그래서 감각 등 신경계가 발달했다. 움직임을 더 효율적이고 섬세하게 하려면 반드시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예측해야 한다. 역사학에서 늘 주장하듯 역사는 미래 예측을 위해 필요한 분야다. 과거 경험에서 미래의 시행착오를 줄여보자는 취지랄까.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경험을 역사로 기록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과거의 경험 중 변곡점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억만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상징적 기억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상징을 통해 예측 능력을 고도로 향상시킬수 있게 되었다. 감각과 지각, 생각과 욕망, 느낌과 기억, 주관과 대상 등의 자연적 진화를 통해 우리는 '상징 능력'을 갖게 되었고, 상징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냄으로서 더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적 진화를 넘어 문화적 진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적 진화는 자연적 진화에 비해 엄청 빠르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적 경험과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명+문화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로 인해 지금의 현대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개와 같은 동물들은 '상징'을 갖고 있지 않다. 갖고 있더라고 상징들을 결합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에 갇혀 있다. 즉 현재의 감각에 종속되어 있다. 개는 감각적 자극을 받으면 바로 그 자극에 반응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상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징'을 통해 예측 능력을 향상시켰고, '미래'라는 개념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에서 해방되었다. 더불어 현재의 감각을 누르고 미래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생겼다. 바로 두려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사람은 늘 미래를 염두하고 예측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감에 쌓여 있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징을 찾는다. 미래 예측능력을 향상시켜준 그 상징말이다. 사람은 상징을 통해 불안감을 해소한다. 상징 결합으로 다가올 미래를 먼저 그려보고, 그 미래를 준비할 여유를 갖게 된다. 상징이 만들어 놓은 불안감을 새로운 상징으로 해소한다고 할까.
이 상징들은 다시 기억된다. 개별적 상징들을 각각 기억하기 보다는 상징들이 서로 결합되는 방식으로 기억된다. 이 기억은 욕망으로 구성된 상징적 대상을 감각할 때 영향을 준다. 감각적 모방에 기억이 개입되어 지각적 재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좋은 상징 기억들은 이미 우리 몸에 습관화되어 있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아도, 집중하기 않아도 자동적으로 발동되어 감각+지각 과정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느낌=촉=낌새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을 바탕에 두고 생각의 논리를 거쳐 우리의 욕망은 다시 재구성된다.
나는 지금까지 설명한 감각에서 불안까지 복잡한 과정을 구조적 도식으로 그려보았다. 그것이 바로 아래의 도식이다. 이 도식을 통해 자신의 불안에 대한 이해, 상징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